고향 땅에 내가 뿌린 볍씨들이 얼마나 퍼트려졌는지는 몰라도 고성이씨 후손이 380여 년간 이 마을에만 900여 명이오 난중 윗대 조상님들 뵐 면목은 있으니 이만하면 마치맞소!
이학수(70살, 동해면 외곡)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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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이 짚을 만지며 살아왔으니 내 벗이기도 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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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정월 어느 날 “들새미(들샘) 양반, 내 막내이 손주가 숙제가 있다캐서 아재집에 가보라 캤소!” “뿌리찾기 해 오라캤는가베예~” “고성에서 아재맨치로 조상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으이께네” “우짜든지 건강 잘 챙기고 단디 댕기시이소예~” “내사 집동가리맨치로 우다싸고 있심미더” 아침에 윗땀 사시는 당산댁 형수님이 마을 회관에 다녀가셨다. 한내에서 시집 오셨으니 우리 동네에 아는 분들이 여럿이다. 벗들이 계시니 손주 기별도 넣으실 겸 다니러 오셨다. 회관에 들러 보일러 기름은 넉넉한지, 아랫목은 뜨뜻한지 손을 넣어보고, 안노인들께 쌍화차를 한 잔씩 타 드렸다. “들새미 양반은 우짠다꼬 안 늙으시노?” “아입미더. 머리숱이 점점 줄어서 걱정임미더” “그런 거는 하나도 안 걱정이라꼬. 죽네사네 하는 사람들이 을매나 많은 시상인데” “하모예, 서로가 다 조심해서 건강 잘 지키는기 장땡임미더” “돌새미(돌샘) 형수님도 동내서 젤 이삔 처이였으이 안즉도 곱심미더예” 서로에게 덕담을 건넨다. 바쁜 세상, 듣기 좋은 말 서로에게 웃음을 주는 말만 해도 모자랄 터인데 나쁜 말, 안 좋은 말을 해서 무엇하랴.
동해면 주민자치회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고 회의에 참석했다. 젊은이들이 여럿인 것을 보니 반갑고도 기쁘다. 어떤 面에는 참석자의 절반이 70대란 얘길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면에는 청년같은 70년대생, 60년대생들이 대부분이다. 둘러보니 내가 네 번째 노령인 듯 싶다. 임원 선출을 하는데 감사에 지명 당했다. “나이 든 내가 맡기에 적합한지 모르겠습니다.” “농협의 감사님이시니 잘 하실 것입니다. 맡아 주십시오.” 감사란 직책이 짜달시리 할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 청년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한다는 생각에 설렌다. 나에게도 저렇게 빛나는 청춘이 있지 않았더냐? # 1960년 정월 어느 날 “쇠죽 부석(부엌)에 숨카둔 고매 몇 개가 오데로 갓삣노?” 큰누야가 부작대기를 들고 골목길로 쌔리 달려오고 있다. 이야(형)들과 자치기를 하던 나는 퍼뜩 식이네 마굿간에 숨었다. 까딱하다가 여물통에 꼬다박힐뻔 했다. 누야한테 잽히모 매타작이다. 어제는 쫀듸기를, 그저께는 빼때기를, 그그저께는 장독간 구멍난 단지에 꼬물쳐 둔 배추뿌리를 뚱차 뭇다. “우리 수야 못 봤나? 내 이노무 자석 잽히기만 하모 장딴지를 뽀사삐끼다. 아이다. 손목대기를 댕강 뿐질러삐끼다.” “우리는 못 봤는데예? 암매도 재 너머에 이야 따라 덕석 말러 갔는거 같심더.” 내가 뚱치온 간식들을 항꾸네 눙갈라 무운 식이캉 구야가 큰누야한테 굽실거리는 것을 흙담 바람벽으로 보고 있자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올 듯이 뛴다. 성깔이 호랭이겉은 큰누야한테 잡히모 클난다. 누야가 화를 가라앉히고 수틀을 잡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기 좋다. 자형한테 잘 비일라꼬 엄청시리 야물게 수를 놓는 거 보모 아매도 곧 시집을 갈끼다. 그날 밤은 식이집 아랫방에서 칭구들캉 이바구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5남매 중 중간에 낀 나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재작꾼이다. 누야, 형, 남동생, 여동생까지 있으니,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이긴 했지만 못 말리는 개구쟁이다.
일만 萬에 벗友의 호를 쓰시는 ‘만우 어르신’은 증조부님이고, 조부님은 머슴을 셋이나 부린 땅부자셨다. 두뇌도 명석하고 총기도 뛰어났지만 성격이 불같으셨다. 오죽하면 ‘땡벌’이란 별호를 얻으셨을까?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입질에 ‘땡벌집 손주’로 불렸다. 나 또한 성격이나 언행이 조부님을 닮은 편이었다. 내가 지나가면 입이 근질거리는 아지매들은 ‘땡벌 손주가 땡벌맨치로 잘 쏘아부치나?’ ‘모타리가 작아도 누가 땡벌한테 아당키기나 할라꼬?’ 한 마디씩 건넸다. 부친은 면서기셨다. 자전거를 타고 동해면사무소까지 출근하시고, 저녁이면 그 자전거로 퇴근하시는 아버지의 옆구리엔 검은 가죽가방이 들려있었다. 가끔은 가방 안에 든 서류를 꺼내 호롱불에 비춰가며 읽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따로 관심을 표하지는 않았다. 혹여라도 글을 읽으라는 말씀을 들하실까봐 걱정스러웠으므로. 나는 공부가 싫었으므로.
# 1970년 정월 어느 날 둘분이 초가에 지붕 얹는 날이다. 지난 늦가을, 타작을 끝내고 한숨 돌린 뒤에, 일손이 넉넉한 차례대로 이엉을 엮었다. 순번에서 제일 늦은 집이 옴마와 단둘이 사는 둘분네다. 장정들은 저마다 키 크고 날씬한 짚단들만 따로 모아 물에 담궈 촉촉하게 추스렸다. 그러고는 볕 잘 드는 담장 밑에 모였다. 왼다리를 뻗어 받침을 하고, 오른손으로 짚 한 줌을 끼우고 왼손 엄지로 조절해 가며 긴 짚단을 꼬았다. 그 이엉이 몇 동 되도록 엮어 돌돌 말아 세우면, 눈 밝은 생쥐들이 타작하고도 모두 털어내지 못한 볍씨를 물려 동동거리고 나왔다. 엮은 이엉을 누군가는 나르고,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옮기고, 솜씨 좋은 웅이 아부지가 처마쪽 추렴부터 마름을 시작하면 점점 샛노란 지붕이 태어났다. 용마루를 단장하는 것으로 모든 초가 지붕 덮기 작업은 끝이 났다. 눈썰미가 있었던 나는, 어른들의 수작업을 어깨너머로 배워 용마루를 트는 것까지 익혔다. 새마을 운동으로 스레트를 덮기 직전까지 초가지붕을 이었으나, 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그들은 점점 사라졌다. 그러나 가끔 생각이 난다. 초가에 깃들어 살던 참새 가족이며 제비 둥지며, 발 많은 지네, 뚱뚱한 굼벵이와 노린재까지~. 그들은 모두 동지며 친구며 가족이었다.
아낙들이 지푸라기 앉은 장독대를 깨끗이 닦고, 김장김치를 장독 안에 차곡차곡 앉히고, 흙마당을 싸리비로 싸락싸락 쓸어내면 겨울이 저절로 깊어갔다. 오래된 할미장독 안에서 동치미가 사각사각 익어갈 무렵이면 고구마는 결이 삭아 맛이 들었다. 빼떼기는 진작에 매상이 끝났고, 쫀듸기는 얼추 줄었고, 처마 밑 곶감은 제삿상에 올릴 것 빼고는 모두 갈 길을 찾아갔다. 밤마다 고구마를 삶아서 가족들의 입맛을 채우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동짓날 기나긴 밤, 동치미 국물은 얼마나 시원하고 달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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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팔려나갈 소들과 함께. 사료값도 줘야하고 명절도 쇠어야 하니 지갑을 좀 채워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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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정월 어느 날 아버지가 농협조합장 선거에 출마하셨다. 옛말에 ‘선거에 나서면 집안 말아먹는 것은 불 보듯 빤하다’고 했는데 우리 집 논문서가 점점 줄어드는 걸 아버지도 증명 중이셨다. 나는 수행비서가 되어 예전 면서기셨던 아버지의 검정 가죽가방을 들고 따라다녔다.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90도 인사를 드렸다. 따지고보면 나는 한 번도 ‘갑’으로 살지 못했다. 언제나 ‘을’의 신세였다. 조합장인 아버지는 ‘갑’이었을 때가 있었을지라도 나는 그 아들로서 을로만 존재했다. 내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기라도 하면 이런 말이 뒤따라왔을 터였다. “저거 아부지 조합장 되더마는 그 아들내미도 어깨죽지에 힘이 엥간이 올랐는갑네” “하모하모, 표 달라꼬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절할 때는 은제던고?” “그라이 구시 드갈 때캉 나올 때캉 맘이 다르단 말이시!” “옌말 하나도 틀린거 없다이~” 이런 말 듣지 않으려면 하나에서 열까지, 온 면민 모두에게 을의 자세로 나를 낮춰야 했다.
마산공고를 졸업, 도회의 직장을 마다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농사를 도맡았다. 아버지는 조합장으로 늘 외근 중이셨고, 집안 살림이며 농사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공부 머리가 있던 형과 남동생은 대학에 진학하여 고향을 떠났다. 중간에 끼어 어리버리 헤매던 내가 조부님의 땅을 물려받아 농사일을 이어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가슴 속에 한 문장이 생생히 남아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 나는 굽은 나무인 채 살기로 했다. 군대에 다녀온 77년부터 82년까지 농촌지도소 농기계담당 기능직원, 농기계 교관이 되었다. 경운기가 막 보급되기 시작했으므로 운전법, 오일교환법, 관리법, 논·밭 갈기 시범까지 모두 내 차지였다. 6년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소 세 마리를 샀다. 본격적으로 소를 기르고 싶었으나 또 다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기구서비스센터’가 필요했는데 이 일을 해 줄 사람이 동해면에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내가 조합장하는 동안 네가 여기서 이 일을 해 줘야겠다. 믿고 맡길 사람이 니 밖에 더 있냐?” 나는 이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본격적으로 내 인생을 살고 싶었으나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조합장 체면을 살려드려야 했다. 그 일을 7년 동안 계속 하면서 소를 키웠다. 80년, 28살이 된 내가 영현면 처자와 연애결혼을 했다. 그리고 남매를 낳았다. 아내는 맘 따뜻하고 손끝 야물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내겐 너무나도 고마운 사람, 내 삶의 진정한 동반자였다. 죽을 때까지 감사와 존중으로 대할 영원한 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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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란 이름은 언제 어디서나 웃음꽃으로 활짝 피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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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정월 어느 날 고성이씨 32대손의 학수는 중년이 되었다. 진심을 다 하여 농사짓고, 소를 키우며, 농촌에 뼈를 묻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동안 시골살이에서 경험할 모든 일들을 겪었다. 이장, 새마을회장, 발전위원장, 농협 이사, 감사, 감투란 감투 또한 죄다 써 보게 되었다. 내가 잘나서 감투를 쓴게 아니라, 농촌 실정을 잘 알고 농촌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젊은이가 없어서라는 것이 맞는 말이리라. 이런 나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책무와 보람이 있으니, 그것은 고성이씨固城李氏 문중 일에 깊이 관여하게 된 사실이다. 내가 사는 곳은 집성촌이다. 예전엔 우리 마을에 93호의 고성이씨가 살았으나 지금은 52호만 남았다. 그동안 세월도 흘렀고 삶의 표면이 많이 변했다. 나는 선산과 제실을 관리하고 148위를 모시는 시향時享을 진행하고 있다. 지방紙榜을 쓰고, 축문을 올린다. 일족의 대소사에 관여하며, 소종小宗, 중종中宗을 거쳐 대종계大宗系의 기록과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가을에 시제를 올리면 평일에는 300여 명, 휴일이 끼는 주말에는 500여 명의 일족이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 태어난 뿌리를 잊지 않고, 조상의 산소를 관장하고, 제를 올리는 일은 나의 기쁨이며 소명이다.
# 2010년 정월 어느 날 남매는 혼인으로 각자의 가정을 마련하여 손주를 안겼으니 내 일은 이제 끝난 셈이다. 홀가분하다. 내 삶에서, 가장의 책무에서 벗어났으니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지난 달에 한라산에 올라 눈구경을 했다. 한라산은 몇 번을 올랐으나 자꾸 가고 싶은 산이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1950미터 상공의 분화구인 백록담을 보노라면 어느 시공간視空間의 까마득한 세월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정월에는 눈이 자주 내렸으므로, 이번 산행에서도 설경을 맞았다. 진달래밭대피소에서 한참을 올라 능선에서 만나는 구상나무의 향기는 나를 한라산으로 부르는 또 다른 매력이다. 축사일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소 키우는 것을 보고 배운 아들에게 잠시 맡기기로 했다. 바람처럼 떠돌고 싶었으나, 땅에 발을 딛고 농사일과 소 키우는 일로 평생을 살아온 내가 아닌가? 시원한 갯내음을 맡으러 바다엘 가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의 모습을 즐기러 산에 오르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지금까지 원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갔고, 아쉬움없이 낚싯대를 드리웠으니 후회도 미련도 없다. 나는 한동안 집안에 있으면 좀이 쑤신다. 마치 위리안치圍籬安置 당한 것 같은 답답함이 나를 옥죈다. 그러면 나는 아들한테 전화하여 축사일을 부탁한다. 어쩌면 우리 집 소들은 다 알 것이다. “음메~ 아들이 먹이 주는 거 보이 우리 할매 산으로 바다로 내빼셨구牛!” “음메~ 할배가 바람 들 때가 사나흘 넘은거 같으牛!” “할배, 잘 댕겨오시우. 건강하고 즐거웁고 유쾌하고 행복하시라牛!” 나는 소의 말을 듣는다. 소도 내 말을 듣는다. 또한 사람의 말을 들으며 서로가 소통하는 일은 당연지사. 땅과 소와 사람과 교감하며 사는 내 삶, 이만하면 잘 사는거 아닌가? 나는 지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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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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