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국의 부활을 꿈꾸며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2월 11일
 |
 |
|
ⓒ 고성신문 |
지난 한 해는 송학동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1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쪽 지역을 지배했던 가야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물론 자만의 기행은 아니었다. 소가야문화보존회와 가야주민수호단 회원을 중심으로 가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주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지역의 유적뿐만 아니라 가야를 함께 만들고 운영했던 형제 국가의 흔적을 돌아보며, 한때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가야인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충만한 한 해였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우리의 눈이 소가야 지역 안에서만 머물고 있었다는 반성과 회한의 시간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가야가 고성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탐방단이 가야의 주 활동무대였던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가야 세력의 확장성을 보여준 호남지방까지 찾아가야 할 정도로 넓은 지역에, 크게는 여섯 개의 국가, 작게는 수십 개의 정치 체제가 독자적으로 경영하던 대국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특성 때문에 소수 정치 집단으로 평가절하되어버렸지만, 4세기 이전에는 신라나 백제를 능가하는 영토와 권력을 갖춘 국가였고, 6세기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 가야가 점유하고 있었던 영토는 일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낙동강 중·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호남 동부 지역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영역이 넓었던 만큼 흔적도 여러 지역에 걸쳐 많은 양이 남아 있다. 가야는 기원 전후 시기에 영남 해안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변한(弁韓) 지역의 정치 세력들이 소국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하면서 가야로 발전했다. ‘가야’라는 명칭도 여러 학설이 있지만 가장 인정받는 것은 ‘겨레’의 옛말이라는 것이다. ‘겨레’라는 말의 기원은 ‘일족(一族)’에서 나온 것으로 근원은 알타이어의 ‘사라(Xala)’이다. 그것이 가라(Kala) > 가야(Kaya) > 캬레(Kya+re) > 겨레(Kyeore)로 음운이 변천한 것으로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야 국가는 모두 뿌리가 같은 한 겨레임이 틀림없다. 현재의 지방자치제처럼 분권 국가였을 뿐이지 크게는 하나의 국가로, 필요할 경우 힘을 합쳐 싸운 것은 한 겨레라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야가 하나의 세력으로 힘을 모은 대표적인 예로, 여덟 개의 가야 국가들이 함께하여 신라와 싸운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을 들 수 있다. ‘포상팔국’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포상팔국에 해당하는 여덟 개 나라는 지금의 고성에 해당하는 고자국(古自國)을 비롯하여,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사물국(史勿國) 등 다섯 나라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세 나라인데, 힘을 합하여 신라군과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필요에 따라 별개로, 때로는 하나가 되었던 나라가 가야이다. 당시 가야는 크게 내륙 중심의 가야와 해상 중심의 가야로 나뉘어 있었다. 어느 세력이 중심이었느냐는 것보다는 서로 장단점을 보완하며 병립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포상팔국의 난’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기록에서 보이는 ‘난(亂)’은 역사의 승자였던 신라의 시각으로 본 것이어서 믿을 수 없다. 가야 여덟 나라가 참전할 정도이면 큰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국가의 흥망을 다툴 만큼의 큰 전쟁에서 소가야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 역할을 짚어 보면 소가야의 위상과 정체성 추정이 가능하다. 포상팔국의 ‘포(浦)’는 바닷가를 말한다. 왜 하필이면 바닷가 옆의 국가들이었을까? 바닷가 옆의 국가로는 크게 김해, 창원, 고성, 사천이 있다. 전쟁 이름에 ‘바닷가’라는 특정 지역을 넣은 것을 보면 내륙 지방의 가야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닷가 옆의 나라만 해도 8개국이나 되었다는 것도 가야의 규모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당시는 해상세력이 가야의 중심에 있었고, 신라와 해상 주도권을 두고 다투는 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포상팔국 전쟁에서 소가야는 맹주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해상활동을 통해 주변의 많은 국가와 교류하며 성장하였다. ‘포상(浦上)’은 요즘 말로 ‘해상(海上)’과 유사한 개념이니 고성을 ‘해상왕국(海上王國)’이라고 부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해양 세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내산리고분군이 가지는 의미가 큰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대부분 내륙 특성을 가진 다른 지역 고분군과 달리 차별성이 있다. 수많은 가야 유적 중에 해양 세력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내산리고분군은 동해면의 성산을 배경으로 적포만을 바라보는 낮은 언덕과 평지에 모여 있는 가야 무덤이다. 이전에는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60여 기만 남아 있다. 봉분의 크기는 대부분 10~15m 안팎으로 송학동 고분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고자국과 소가야의 관문을 지키는 역할을 하던 해양 세력이 있었던 곳임을 고려하면 송학동고분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처럼 고분의 수량이나 고분군의 넓이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많고 크지만, ‘해상왕국의 부활’을 부르짖는 고성의 자존을 생각할 때 내산리고분군이 가지는 의미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산리고분군이 유네스코 등재 목록에 올라가지 않음은 유감이라 하겠다. 조상님이 묻혀 있는 성산 언덕에서 적포만을 내려다보며 한때 가야국의 맹주였던 소가야의 부활을 꿈꾼다. 해상왕국의 부활은 내산리고분군의 위상을 찾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2년 02월 11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