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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6명의 자식이 내 무기였느니라. 세상살이 고달파도 자식을 등에 업으면 무서운 게 없으이 옴마는 그만치 단단하고 강한 기라

강순남(79세, 고성읍)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10월 08일
↑↑ 평생을 살아온 고성공룡시장, 저 골목길 거닐다가 신발 수십 켤레 닳았으니
ⓒ 고성신문
↑↑ 몇 평 남짓의 이 가게에서 수많은 밥그릇과 시락국 보시로 살아왔으니 잠시 숨 돌리고 우리 술이나 한 잔 합세
ⓒ 고성신문
ⓒ 고성신문
↑↑ 칠순 잔치도 했고, 여섯 자식들의 넘치는 효성과 사랑으로 행복하였네라
ⓒ 고성신문
“할매, 시락국 있어예?”
“아이고야, 우짜꼬? 시락국은 없지만 나물은 있으이 무울래?”
“한 그릇 비비 무까예?”
“하모하모, 시장이 반찬이라 안 쿠나. 퍼뜩 요기 앉거라”
“바쁘다본께 고마 밥때를 놓칩심미더”
“다 묵고 살라꼬 하는거 아이더나? 밥은 제 때 묵고 댕기야제”
“탁배기도 한 병 주이소예”
“그랴그랴, 목을 축이고 살아야제”
“하이고 씨원타. 할매, 세상에서 젤로 맛난게 막걸립미더”
“아이다. 막걸리보다 밥이 더 맛나야 살아간데이. 내 자네를 치다봉께 앞길이 구만리 거튼데 곡주보다 밥을 더 챙겨 자시야제”
“고맙심미더. 내 옴마한테 들어본 말을 할매한테서 듣심미더. 눈물이 날라쿠네예”
“그래, 자네 옴마는 안즉 살아계신가?”
“……”

고성공룡시장 안 ‘밤내 집’은 따신 정이 폴폴 난다. 어느 지역에나 있는 재래시장 안의 작고 허름한 식당이지만 순남할매가 계셔서 흐르는 기운은 따순 봄볕이다. 아니 여문 가을볕이다.
평생을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살아오셨기에, 사람들에게 퍼먹인 수 많은 밥그릇만큼, 시락국만큼 인정을 쌓았다. 이제 그 인정이 가을볕처럼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여물어가는 중이다.
벽에 걸린 글귀에 눈이 간다.
‘거물거물 서산에 해 지면, 자넨 그 돈 지고 갈래 이고 갈래? 자! 이리 오게나 우리 술이나 한 잔 하세.’
옴마를 잃은 나그네가 ‘밤내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뒷꼭지가 훤~ 하고 낡은 청바지의 무릎은 튀어나왔다. 허리춤에서 덜렁대는 가죽띠는 여러가닥의 줄이 잡혔다. 얼마나 오래 나그네와 함께 세월을 이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런 나그네가 한 둘 이었으랴? 수 많은 길손들이, 장꾼들이, 손님들이 밤내 집을 드나들었으니 문지방이 닳았을테다.

“모친, 언제부터 이 시장에서 밥을 파셨어예?”
“한 40년 되었나?”
“공룡시장의 전설과 같네예. 반백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시장도 많이 변했지예?”
“시장이 변한 것보다 사람이 변했다 캐야 안 되긋나? 내 옴마도 이 시장에서 뼈를 닳다가 돌아가싯고, 느티나무 앞 성냥간(대장간) 할배도, 그 메느리가 하던 삼호 목욕탕도 마이 변했다 아이가.”
“그라모 모친의 기억에 남은 공룡시장 이야기 좀 들려 주시지예~”

“내가 일곱 살 들던 해에 6.25 전쟁이 안 났던가베. 내는 막 입학을 했던기라. 학교에서는 공부는 안 갈차주고 날마다 굴속에 숨는 방법만 배워주더라꼬. 서로서로 손을 잡고 한 줄로 서서 등을 굴 한쪽에 부치고 조용히 있으모 된다카더만. 비행기는 윙윙 날아댕기제, 북한군이 근처까지 왔다카제. 얼마나 무섭더노?
그 때 우리 옴마는 이 시장에서 엿기름집을 했다 아이가. 우리 외가가 부자였다쿠데. 머슴을 셋이나 델꼬 나락(벼)농사를 지었대. 그 농사 지은 알곡과 이웃에서 거둔 곡식들을 말카 거다와서는 고성 장에서 싸전(쌀가제)을 열었다카네. 옴마는 옆에서 엿기름을 달여 팔았는기라.
내는 가게 앞에서 고무줄을 뛰거나 오자미 놀이를 하면서 세상 무서븐 것도 불븐 것도 없이 살았다 아이가. 느티나무는 그 시절에도 저렇게 키가 멀쭉하게 크고 잘 생긴 나무였던기라. 나무 옆에 성냥간 할배 집에 을매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는지 모리제.
그때는 말카이 농사짓고 살았다 아이가. 저 건너 섬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거든. 그 섬사람들이 배 타고 오믄 오만떼만 것들을 싣고와서 철뚝에 내리제. 염소와 닭은 말도 몬하게 많이 몰고 왔제. 농사 지은 고매, 참깨, 콩, 폿, 수수, 조, 없는거 없이 다 들고 장에 오는기라.
우리 외가 싸전에도 단골들이 많았다 아이가. 그 섬사람들이 싸전에 곡식을 내다팔고 내 옴마가 달인 쌀엿을 한그석 사 가디라. 그걸로 고추장도 담고 반찬도 해 묵고 그랬을끼라. 내는 시장에서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바꾸기도 하고 장사하는 것도 봄서 자란기제.
내가 가마이 본께네. 우리 옴마한테 엿을 한베이(병) 두베이 사 가는 사람들이 말카 외상으로 하는기라. 옴마가 그 집 벼럭박(벽)에 숯으로 바를 정(正)을 끄어놓는데 그거이 사람들이 사 가는 베이 숫잔기라. 근데 와 요새도 그 때도 속이 시꺼먼 사람들이 안 있던가베? 내가 가만히 치다보고 있으모, 손가락으로 그 숯을 삭삭 지우는기라. 네 베이를 두 베이로 맹글어삐는기제. 내가 옴마한테 일러바치모 그 아지매가 내 보고 눈을 째려보고 그렇티라.”

“모친이 대신 장부를 만들어 드렸어야지예~”
“일곱살 짜리가 뭐를 알끼고? 그래 우리 집에도 일 하는 사람들이 몇 있었던기라. 외가 싸전에서 쌀을 가져와서는 떡도 해서 팔고, 단술도 끼리고 이것저것 돈 되는 거를 맹글어 팔더라꼬. 장사하는거를 봉께 재미도 있고 내가 하모 더 잘 할 것 같애서 자꾸 가게를 돌아댕긴께 한날은 내 옴마가 내를 불러 놓고는 야단을 치시데.
-가수내(여식)도 공부를 해야 된다. 내 속에 든 양식과 지식은 아무도 몬 빼끌어 간다. 내 손에 든 과자와 고매는 넘한테 뺏기는기 세상 이치다. 니는 우짜든지 공부를 해서 속에 넣어라-
내는 오메가 그 카는대로 공부를 했제. 고성초 45회, 고성여중 9회, 고성여고 13회로 졸업했지. 내가 자랄 때는 장삿집 딸이라도 귀하게 큰 기라.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오빠 있고 언니캉 내캉 삼남매가 자랐는디 오빠가 부모 맞잡이 아이든가베. 아부지 없이 자라서 ‘본데 없는 여식’이란 말 들으모 안 된다꼬 을매나 쎄게 조이든지 말도 마라. 그 때는 여남은 살 넘으모 없는 살림에 한 입이라도 덜라꼬 머스마들은 소꼴머슴으로, 가스나들은 식모나 애보기로 넘의 집 살이를 하러 가던 시절이었는기라.
내가 여고 졸업하고 집에서 지내니까 심심하고 세상이 궁금한기라. 옆집 분이캉 뒷집 순자가 마산의 한일합섬인가 하는데 일하러 갔다옴시로 명절이 되모 정종을 한 병 떠억하니 사 오더라꼬. 내는 그기 얼마나 붑던지. 그래 한 날은 오빠한테 매달릿제.
-오빠, 내가 도시에 가모 공장살이는 안 하고 우짜든지 경리나 사무를 보는 사람 될끼요. 내도 마산에 보내주소. 올 때는 오빠가 좋아하는 정종 두 병 사서 옆구리에 끼고 올끼요-
내가 그 말 했다가 집에서 쪼끼(쫓겨)나서 이모집에서 몇 밤이나 자고 지우(겨우) 들어왔다 아이든가베.”
“오라버님이 엄청시리 무서븐 호랭이였던 갑심더.”

“스무살이 된께 선이 자꾸 들어오는기라. 내는 시집 가기 싫다꼬 자꾸 울었지. 중신어미도 우리 집에 왔다가 내 우는거 보고는 쪼매 더 있다가 시집 보내자캄서 옴마한테 청을 넣더라꼬.
한 날은 훤훤장부가 우리 집에 선을 보러 왔다카데. 군대에 가서 몇 년을 썩히고 왔더이 나이가 좀 들어서 퍼뜩 장개를 가야된다꼬 자꾸 보채더라꼬. 그래 옴마캉 오빠가 날을 잡더이 번개같이 시집을 가라쿠데. 내야 뭣도 모리고 옴마 시키는대로 시집을 갔다 아이가.
그래, 우리 신랑은 사람이 참 좋디라. 농사를 짓긴 했는디 내는 바깥일을 하낫도 안 시키고 살림만 살아라 쿠데. 아가들이 줄줄이 태어났으이 자식들 키우는데 바빴고.
세상사가 우찌 돌아가는 줄도 모리고 살다가 내 나이 마흔 살에 신랑이 뇌출혈로 돌아가시데. 그 때 내 심정이 우떤지는 아이고야~~ 지금도 고마 컥컥 막힌다.
우짤끼고? 자식들은 줄줄이 여섯인데 굶고 있을 수야 없지. 함지박을 이고 나섰던거 아인가베. 철뚝에 가서 배에 싣고 오는 것들을 받아서 시장에 내다 팔았제. 섬사람들은 멍게를 새끼줄에 끼워서 줄줄이 들고왔디라. 그 때는 비닐이 없으니 새끼줄로 말캉 쪼매던 시절이제.”

“이 밥집은 언제 시작했어예?”
“내가 하도 함지박을 이고 댕긴께 옴마가 돈을 쪼매 구해서 가게를 구해줌서 밥을 해서 팔아라 카데. 을매나 좋노. 이고지고 댕기는 것도 몸에 부치제. 새끼들은 먹이야제. 그래서 이참저참 생각해서 밥집을 시작했는기라.”
“모친처럼 예삔데 과숫댁이라꼬 꼬시는 사람들이 없었어예?”
“말도 마라. 내도 밥장사 하이 듣는 귀가 안 있더라? 여편네들 수다가 많다캐도 남정네들 입도 참 무십더라. 방구만 텅 끼면 똥 쌌더라 카는기 세상 인심 아이든가베. 손목 한 번 잡았으모 ‘속곳 벗낏다’ 카고, 말 한 번 부치모 ‘몸도 맞찼다’ 카고, 한번 웃어주모 ‘그 년 내끼다’ 카고, 남정네들 입바람도 참 얄궂더라.
내한테도 들이대는 남정네들 많았어야. 하루는 진주 산다카는 남정네가 우리 식당에서 멈칫대고 있더라꼬. 내는 눈치는 챘지만 모린체 하고 가마이 지켜만 봤제. 그래 이 사람이 덜컥 내 손을 잡음서 이카더라꼬”
“뭐라카데예?”
“아지매, 내 이녘과 데이트 함 할라꼬 사흘동안 여관에서 지냈소. 함 만나주이소.”
“내가 빤히 치다봄서 내 손목을 내밀었는기라. 자, 잡으소. 이 손목은 내 손목이 아이요. 내 새끼가 여섯인데, 그 여섯 자식이 이 손목에 달맀소. 데이트 하모 내 여섯 새끼들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키고 다 키아줘야 되요. 그래도 내 손목 잡을끼요? 자신있으모 해보소. 이카이 뒤도 안 돌아보고 내삐더라. 여섯 자식이 내를 지키는 무기였던기라. 내가 남정네 따라 나서모 여섯 자식들은 누가 키우노? 내 새끼들이 뭣이 되긋노? 그 생각으로 내가 단디단디 챙기고 살았던거 아인가베. 이 고성장이 빤한데, 이 좁은 장터에서 행실 나쁘다 소문나모, 내 딸자식들 우째 시집 보낼끼고? 내 딸자식들 생각하모 내가 처신을 단디 할 수밖에 없던기라.”

“대단하시네예. 여섯 자식 키우는기 보통 일이 아인데. 자식들은 잘 커 주던가예?”
“내는 자식들한테 늘 미안하고 고맙제. 옴마가 새벽부터 시장에 장사하러 가야하는데 저거끼리 밥 해 묵고, 동생들 챙기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안 시키도 잘 하던기라. 부모가 자식의 거울이 되어야 하는데 우짜든지 자식들 욕 안 듣낄라꼬 하는데꺼정 했디라.”
“좋아하시는 일이 몇 개는 있었지예?” “신명이 있었던갑더라꼬. 고성풍물단 회장을 한동안 맡아서 매구 칠 때마다 앞장을 섰제. 내는 주로 포수를 맡았제. 이 포수라는 자리가 에럽거든. 장구보다 몇 바꾸를 더 돌아야 되제. 사람 만내모 무조건 절을 해야되제. 행진할 때 줄을 맞춰줘야 되제. 돈도 벌어야제. 군수님도 의원님도 만내모 총 쏘는 흉내를 냄시로 망태기에 돈을 넣어줄 때까지 기다리는기라.”
“매구 치는데 젤 중요한 사람이네예?”
“그렇제. 군수님이 이카신다 아이가 –김비서, 밤내할매 총 쏜다. 퍼뜩 지갑 벌리라- 그라모 모두 웃고 박수치고 난리제. 내가 돈도 걷고 쌀캉 곡식들을 걷어서는 쌀 독에 넣는기라. 혼자 사는 할배 할매들이 쌀 떨어지모 독에서 꺼내서 밥을 해 드시라꼬.”

“시래기국 인기가 억수로 좋담서예?”
“내는 새복 4시만 되모 시장에 나와서 국을 끼린다 아이가. 집에 가마이 누워 있으모 뭐할끼고. 시장에 나오모 펄떡펄떡 뛰는 생선도 보고, 사람들도 만내고 을매나 좋노? 살아있는 생물을 보모 생기를 느낀다 아이가. 초장 막장을 맹글어서 1인당 2천 원을 받제. 비빔밥 물라쿠모 비벼주고, 시락국 물라쿠모 밥 말아주고, 막걸리 마실라카모 술잔 챙겨주고, 생선회 뜨 오면 상차림 해 주고, 이리 사는기 억수로 재밌다. 사람들한테 밥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보시가 오데 있노? 내는 죽을때꺼정 밥 퍼 주는기 소원이다.”
“여섯 자녀들은 모두 안녕하신가예?”
“하모, 내가 손주가 15명이다. 다섯째가 넷을 낳았거든. 내 자식들이 옴마한테 잘 하제. 옴마가 저거들 키운다꼬 욕봤담서 얼매나 고마베 하는지 모린다. 내가 시장통에서 장사해서 6남매 모두 대학 공부시킨 어메다. 둘은 전문대학만 시켰어도 다들 밥벌이 잘하고 세상에 씰모있는 사람으로 살제. 내는 안 부끄럽게 살았다. 더 욕심없을맨치로 살았으이 잘 살아온기제”
초가을비가 내리는 고성공룡장터 ‘밤내 집’에 꼬신 내음이 퍼진다.
밤내 띠(댁), 밤내 모친, 밤내 할매, 밤내 포수, 밤내 주인이 퍼주시는 ‘밤내 시락국’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는 길, 낡고 닳은 문지방에 걸린 인정을 한 줌 걷어 줌치에 넣었다.
어딘가 이 情을 필요로 하는 곳 있으리. 이 情에 굶주린 사람 있으리. 이 精으로 살아가는 사람 사는 이야기 들어줄 이 있으리.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10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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