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동안 가장 큰 마음부자로 살 수 있어 감사합니다”
최금용 고성읍 성내리 남내마을 전 이장
1972년부터 50년간 이장, 전국 최장수 기록
마을 대소사 직접 챙기며 행정과 가교 역할
천리교 고성교회 신도회장, 장학금 기부 열심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1년 04월 09일
|
 |
|
↑↑ 남내마을 최금용 전 이장은 한결같이 마을 대소사를 챙기며 50년 세월을 보냈다. 그가 누비는 남내마을 골목마다 그의 손길과 숨결이 가득하다. |
ⓒ 고성신문 |
|
50년 ‘머슴살이’가 끝났다. 서른셋, 새파란 시절에 시작했는데 강산이 다섯 번 변하고서야 이별하게 됐다. 모르긴 몰라도 50년이면 전국 최장수 기록일 것이다. 고성읍 성내리 남내마을 최금용 전 이장 이야기다. “이장은 주민들의 머슴 아닙니까. 언제든 어디든 주민들이 불편하면 달려가서 해결하고, 마을 대소사를 챙기는 게 이장이지요. 마을일을 해결하기 위해 행정과 가교역할을 하는 것도 이장이 할 일이에요. 힘들다고 생각하면 못했을 겁니다. 늘 신뢰하고 맡겨주시는 주민들 덕분입니다.” 방범대원으로 봉사를 시작했다가 마을 살림을 돌봐달라는 말에 1972년 이장을 맡았다. 5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내마을에는 없었던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생겼고, 거미줄 같은 골목골목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넓어졌다. 얼마 전에는 삼호탕 앞에 있는 나무님이 주차장 공사로 사라질 판이라 주민들, 시장 상인들과 함께 나무님을 지켜내는 데도 앞장섰다. 주민들의 말은 흘리는 것이라도 절대 허투루 듣지 않는다.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총기가 20대 청년 못지 않다. 참으로 천성인 게, 그는 이장수당을 자신을 위해 써본 적이 없다. 모아둔 이장수당은 매년 장학금으로 내놨다. 장학금을 주기 시작한 건 이장 경력보다 더 오래됐다. 1960년대,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친구들이 하얀 셔츠를 받쳐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닐 때 그는 하얀 이발 가운을 입고 돈을 벌어야 했다. 동생들 뒷바라지하다 보면 주머니는 늘 가벼웠다. 술과 담배를 절대 하지 않았다. 그 돈을 모아야겠다 생각했다. 1963년이었다. 구만면 어느 학생이 돈이 없어 중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딱한 사정이 들려왔다.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전했다.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한두 푼씩 돈이 모이면 어려운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이장일을 하면서도 장학금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돈을 통장에 차곡차곡 모았다면 고성읍내 번듯한 아파트 두어 채는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최금용 이장은 미래를 위해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보험이자 투자는 아이들을 잘 키워내는 일이라 믿고 있다. 천리교 고성교회 신도회장을 오랫동안 맡아오며 다진 신앙심은 그가 나눔을 실천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지 않습니까. 인간은 우주 속에 보이지도 않게 떠다니는 먼지 같은 삶이라 해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인생은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가 저에게는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겁니다. 그게 제 행복이에요.” 몇 해 전만 해도 최금용 이장은 군민체육대회 축구경기 아나운서였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파월장병들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것도 그에게는 중요한 일과였다. 이역만리에서 편지를 받아들 장병들이 잠시나마 설레라고 여자이름을 써서 보내기도 했다. 자그마치 6천 통이었다. 한 번에 100통 가까운 편지봉투보따리를 우체국에 가서 부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즐겁고 신이 났다. 그 덕분에 체신부(현 우정사업본부) 편지왕 상도 받았다. 작정했던 1만 통을 다 못 채운 것은 두고두고 아쉽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제일 쉽게 표할 방법을 찾다가 사비를 털어 태극기를 나눠주기도 했다. 한국BBS 경남연맹에서는 43년, 경상남도아동위원협의회는 34년 활동했다.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 보니 군민상도 받았다. 다른 어떤 상보다 감사한 상이 군민 이름으로 주는 상이었다. 군민상을 받고 몇 해 지나 IMF 사태가 터졌다. 온 나라가 금모으기로 나라를 살리겠다 하니 군민상 부상으로 받은 순금 10돈을 금모으기에 선뜻 내놨다. 뿐만 아니다. 터키 지진, 인도네시아 쓰나미 등등 전 세계 곳곳에 재난구호기금을 보냈다. 통일에도 관심이 많다. 비무장지대 DMZ가 지구촌 국제관광도시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늘 품고 있다. 그래서 평양에 소학교를 세우는 일에도 제일 먼저 100만 원을 냈다. 이장일만큼 열정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나누는 일이다. 마을일을 50년동안 돌보느라 정작 집안일은 돌보지 못한 것이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처럼 남아있다. 그가 마을일을 보고 봉사하는 동안 그와 세월을 함께한 아내는 아이 셋을 모두 남부러울 것 없이 훌륭하게 장성시켰다. 한정순 씨는 언제나 그에게 세상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돼주는 아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는 것도 행복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더 행복한 게 동네분들, 아이들 웃는 얼굴 보는 일이에요. 삶의 가치는 누구나 다르잖아요. 반세기라고 해도 나누며 행복한 세월을 살다 보니 정말 쏜살같이 흘러버렸습니다. 아마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장만 안 할 뿐, 똑같이 살지 않을까요? 그게 제일 즐거운 일이니까요.” 어느새 팔순을 훌쩍 넘겼다. 그와 함께 남내마을 곳곳을 누빈 오토바이도 꽤나 낡았다. 하지만 여전히 팔팔하게 골목을 달린다. 마치 팔순이 넘어도 활기 넘치는 최금용 전 이장처럼. “전 남자이고 아버지지만 어머니 같은 따뜻한 품으로 고성의 아이들을 키워내고 싶습니다. 돈이 많아야 부자인 건 아니에요. 마음부자가 제일 큰 부자이지요. 세상에 저만큼 큰 부자가 또 있겠습니까.” |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1년 04월 09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