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꽃 이야기
송이로 툭툭 떨어지는 동백도, 화려하되 향기가 부족하다는 모란도, 그 진액에 금기의 마약성분을 지닌 양귀비도 그렸다. 선비들이 곁에 두고 아낀다는 붓꽃도, 장사익의 노래로 가슴 절절하게 다가오는 해당화도, 홍역으로 잃은 갓난쟁이들을 단지에 넣어 묻은 애기장터에 눈물겹게 피던 찔레꽃도 그렸다. 장미, 능소화, 자목련과 산당화를 곱게 피우다가 달개비를 그릴 때는 목이 메었다.
타작마당가에 피던 제비꽃과 민들레는 나처럼 키 작은 모습으로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다. 제비꽃의 여러 가지 다른 이름처럼 방석꽃으로 피어 식구들의 앉을 자리가 되었고, 나물꽃 닮아 풀물 들도록 나물을 뜯었고, 앉은뱅이꽃 이름 달고 온종일 밭고랑을 훑어온 나날이었다. 민들레 이파리를 찧어 먹으면 간 해독에 좋다고 종종걸음으로 들판을 휩쓸고 다니기도 했다.
옥양목이나 린넨, 황마, 광목 인견에 그림을 그리노라면 나의 어제를 꽃과 잎으로 펼치는 시간이 되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번진다. 오래고 긴 노동으로 손가락이 휘었고 손톱이 닳았지만 그런 시간들로 내 삶이 씨실과 날실의 직조로 짜여 여기 펼쳐지게 되었다.
시아버님은 단호하셨고 꼿꼿하셨다. 부잣집 대감님의 호령은 여차 없으셨고, 눈빛은 매서웠다.
시모님과 남편을 연거푸 저 세상으로 보낸 맏며느리는 죄인처럼 머슴처럼 나날을 이어갔다.
100여 마지기의 논에 모내기를 할 때면, 온종일 부엌에서 장독으로 개미처럼 재빨라야 했다.
본격적인 모내기가 시작되기 전에 할 일도 많았다. 겨울에 빚어둔 누룩으로 술을 담고, 콩을 불려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었다. 도토리는 넉넉히 빻아 묵을 쑤었고 호랑이콩을 듬성듬성 넣은 보리개떡도 한 솥 쪄 냈다. 고추장 장떡이며 비지장이며 온갖 절임 음식까지 다 해 놓고 모내기를 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못줄을 잡고 ‘어~이! 줄 넘어 간다.’ 장단에 맞춰 모를 내면, 벼농사의 절반이 지나갔던 것을, 나는 그 많은 일꾼들의 밥과 참과 술을 지어 이고 나르며 손이 부르트고 짓물렀다. 옥양목 앞치마는 흙바람에 바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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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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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덜컥 밖으로 나갔다. 처음 찾아간 곳이 고성문화원이었다.
몸빼 바지에 장바구니를 들고 허태동 선생님의 한학반 수업에 들어갔다. ‘저도 앉아도 되냐요?’ 어리버리한 내 모습을 학우들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쉬는 시간에 ‘여기 앉아도 되냐요?’라고 화답하며 다가와 준 그들이 있었기에 처음 나서본 그 세상은 화안하고 밝았다.
풍물은 신명이 났다. ‘징을 들고는 휘젓고 뛰어 다니더라’는 칭찬이 넘쳤다.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속의 춤꾼 기질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핏줄의 대물림이었을까? 피는 못 속인 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둘째 아들은 부산시립무용단 단원이 되어 학춤을 추게 된 것일까?
봉사활동과 이런저런 공연을 하며 인생을 즐겼고 서예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다.
지난 20여 년간 나는 참 많은 활동을 하며 살았다.
서각을 하며 나무의 나이테를 하나씩 헤아렸다. 네모난 판에 ‘仁禮智’ ‘養喜伸’ ‘정향만’ ‘상선약수’ ‘온고지신’ ‘이인위리’ ‘세세평안’ ‘좋은생각’ 이런 글자를 새기며 마음의 평화와 덕을 함께 새겼다.
매·난·국·죽을 치며 사군자의 도리를 익히고 자연의 순리를 깨달았다.
모시꽃을 만들고 연을 만들고 전통무용반을 기웃거렸다.
임진왜란 때, 고성의 의병 ‘기생 월이’의 연극에 어머니 역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역량이 부족하다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성실과 책임감’이란 이름표를 달게 되어 문화원의 이런저런 일과 향교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세월이 쏜 화살처럼 날아가는 동안 내겐 보람과 기쁨이 남았다. 서예와 서각, 그림과 글, 천아트에 새긴 꽃들이 세월을 증거하며 우리 집에 가득하다. 전문적인 소양과 예술적 美感, 문학적 완성도는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는 내 삶이 오롯이 담겨있기에 소중하고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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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기념행사에 온 가족이 모여 축하하며 그간의 노고를 배읍해 드렸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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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내겐 잘 자라준 자식 넷과 알토란 같이 야문 손주들이 있어 자랑스럽다.
‘땅부자는 일부자’라는 말처럼 나는 평생 일에 파묻혀 살았다. 자식들이 어릴 때 손잡고 교문까지 가 준적도 없었고, 학부모 노릇 한 번 제대로 못했다. 큰 딸이 동생들을 챙겼고, 큰아들이 알아서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잘 했다. 가장이 떠난 자리를 자식들이 대신해 준 셈이다.
심하게 아파 몸살이 나면 그 날이 쉬는 날이었다. 끙끙 앓으며 누운 나를 내게 시아버님이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우리 집 큰머슴 마이 아프다. 건드리지 말아라.” 그 말씀 뒤 끝에 ‘약 좀 지어오너라. 돈 걱정은 말고!’까지 들려주셨으면 좋으련만. 경상도 양반 가문의 대쪽 같은 어른은 늘 본인이 옳으셨다. 나 또한 어른의 한 말씀 한 마디도 거역 않고 살았다.
“내가 며느리한테 왜 맡기냐!”라는 추상같은 호령도, 홀로된 며느리에게 짐을 더 지우지 않으시려는 깊은 속마음인 줄 이제는 나도 안다. 돌아가신 뒤에는 내 한 쪽 어깨가 날아간 듯, 내 반평생이 허물어진 듯 아프고 허전했다.
제목: 어머님 전상서
어머니 글로서 再拜 드리고 哭하며 고합니다.
천지간 만물 중에 유인이 박복하여 우리 어머님 부귀영화 누리시고 백세장수 하시다가 일조별세하시어도 슬픈 마음 끝없는데 50당년 무슨 연세 그리 많아 팔십 평생 못다 살고 다시 못올 황천길에 불귀객이 웬 말인가요.
“희야 내 없어도 이 자리 잘 지키고 논밭일랑 잘 가꿔 먹어라” 하신 고인의 말씀 기억합니다.
속 깊은 마음 현철하신 어머님의 일생사를 회고하니 제 가슴이 아픕니다.
선산이씨 곱게 자라 김해 허씨 가문 들어, 오십세를 사시면서 얼마나 어려웠을지 가늠합니다.
제목: 내 삶과 손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와서 어른들 좋아하시면 그것이 다인 줄 알았다.
첫겨울 빨래하러 냇가에 갔을 때 시린 손 끝에 흘러내린 양잿물 삶은 독기
내 손을 잡고 ‘호호’ 불어주던 남편의 다정함은 어제인 듯 선연하다.
병이 깊어 울부짖는 그 고통을 옆에서 손 잡아 주는 것으로 대신할 때
내 한 세상이 허물어져 내렸지만 나는 또 자식 손을 붙들고 묵묵히 걸었다.
나는 대한민국행촌서예대전 초대작가, 양산관설당 서예 초대작가로 활동하며 서울신사임당 서예대전에 계속 출품을 하고 있다. 국가공인 자격증을 땄고, 지금도 문화원에서 한학공부를 계속 하고 있다.
이제 내 삶은 능소화 빛으로 물들었다. 아직 중천에서 서녘으로 기울어져 가는 중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세월은 쏜살같이 나를 업고 노을빛 속으로 달려간다. 그래도 나는 씨앗을 뿌리고 감자를 심고 마늘밭에 풀을 맬 것이다.
시집와서 지금까지 아니 내 삶의 마지막까지 동무되어 줄 큰며느리에게 남은 내 생의 여백을 모두 맡기려 한다. 자식들의 이름 일일이 불러주지 않아도, 내 글 속에 그 마음 모두 담겼으니 알리라. 내 생의 다함없는 그 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와 주어 고맙다.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