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찾기+ 2025-07-01 17:17:51
회원가입기사쓰기전체기사보기원격
뉴스 > 사람 사는 이야기

세월 밭에 忍苦의 이랑 만들어 눈물과 희망 씨앗 뿌렸더니, 문전옥답 서마지기를 다 채워도 남을 눈물은 우리 몫, 희망은 후손들의 몫

대가면 연지리 심씨 가문의 세 여자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1월 18일
↑↑ 이 마루에서 눈 먼 딸의 머리를 빗겼고 재봉틀을 돌려 옷을 지었고 곶감을 말렸고 다듬이돌을 두드렸으니, 평생의 날들이 켜켜이 쌓였으리. 생전의 강분선 님
ⓒ 고성신문
↑↑ 작은 아들이 대학 졸업하던 날, 아비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그 아들의 가슴에 안겨 하염없이 우시던 어머니 강분선 님
ⓒ 고성신문
↑↑ 지난했던 세월이 두 아들을 이렇게 장성시켰던 것을…. 고운 한복 차림의 모자 세 사람 그 앞섶에 쏟아지던 햇살은 환하고 밝았다.
ⓒ 고성신문
# 강분선(1917년생. 89세에 사망) 未亡人의 생
부러웠다.
해거름녘 노을을 등에 업은 남정네는 소를 몰고 아낙은 휘적휘적 따라 걷는 그 길이.
볕 따스한 밭둑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속삭이는 그 모습이.
‘보소, 궁디에 티끌이 묻었소. 내가 털어 줄테니 가만 있어 보소.’ 그 음정이.
‘우리 자식들 통신표 보모 내사 참말 살 맛이 나요. 앞길이 훤~하요.’ 그 웃음이.
‘임자, 이렇게 무거운 거는 내가 들어줄끼요.’ 그 손길이.
지아비를 하늘처럼 받들고 살았다. 18살 시집 올 때 내 아버지는 당부하셨다.
“여자는 三從之道(삼종지도)를 따라 살면 된다. 다른 말은 아무 필요 없는 것이다.”
모시적삼에 두루마기를 나비의 날개짓처럼 펄럭이는 내 아버지의 갓은 높았고, 팔자 수염은 은빛으로 반짝였다. 걸음걸이는 신선처럼 가볍고 맑았으니 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도였다.
시집 온 첫 날밤, 대가면 연지리 밤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마당의 초례상이 걷히고 신방의 촛불이 그림자를 드리울 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신랑은 수줍게 내 모습을 흘겨보며 웃음 지었다. 몇 잔 술에 얼굴은 능소화빛처럼 붉었고 창밖 별빛은 밝았다. 반듯한 이마 아래 콧대는 높았고 입매는 부드러웠고 가슴은 따뜻했다.
종갓집 새댁의 하루는 새벽부터 한 밤까지 쉴 틈이 없었다. 대문이 닳도록 손님이 드나들었고 사랑엔 신랑 친구들이 밤 새워 책을 읽거나 선문답을 이어가는 듯 엄숙하고도 장엄한 그림자가 내 삶에 횃대보처럼 드리워졌다. 돌아서면 한 달이 흘렀고 마당 언저리에는 창포가 피었다 지고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다투듯 꽃송이를 열었다.
2년 뒤 신랑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언제 돌아오겠다는 귀띔의 언약도 없이 신랑을 떠나보내고 달거리가 없어 놀라는 사이 배가 불러왔다. 딸을 낳았다. 내 아버지를 닮은 듯, 유학 떠난 신랑을 닮은 듯, 이목구비 뚜렷하고 눈망울이 반달처럼 예쁜 아이였다.
신랑은 가끔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사랑채에 기거하시는 시아버님이 안채로 올려보내시는 그 편지 어디에도 내 안부는 없었다.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시며...’로 시작하여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애국충정, 가문과 시어른의 안위를 걱정하는 효행지도의 문안인사가 길었다. 말씀 중간 그 어디쯤 숨겼을 각시에 대한 안녕을 더듬느라 딸과 보내는 밤은 더 없이 깊었다.
일본에서 공부 끝내고 위풍당당 고향으로 돌아올 날 기다리는 내 맘은 아랑곳없이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고 초죽음이 되었으니 죄인을 인수해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도 내 손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밥을 지어 올리니 좋았다. 웃음소리 자그랑대던 시절이 지나고 해방둥이 아들을 낳았다. 시부모님이 몹시 기뻐하셔서 나도 우쭐했다. 신랑은 밖으로 나돌면서 나랏일을 걱정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할 일이 많다며 점점 얼굴 보는 날이 줄었는데 또 감옥에 갇혔다는 기별이 왔다. 둘째를 강보에 싸 안고 면회를 갔더니 아들 이름을 ‘일민’이라 지어주었다. 그 뒤 우리 가족은 신랑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 떠도는 소문이 바람결 따라 우리 집 담장을 넘어왔을 뿐이다.
시어른을 봉양하고, 아이 셋을 먹여 살려야 했다. 길쌈하고 바느질하며 물레에 세월을 감았다.
큰아들이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하려 했으나 연좌제의 덫에 걸려 시험 응시조차 포기하는 아쉬움을 겪었다. 작은아들은 초․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였다. 부산으로 유학을 보냈고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치열하게 공부하더니 대학 졸업하고 KBS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었다. 두 아들은 어미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었고 깊은 효심으로 봉양이 돈독했다.
시간이 화살처럼 흘러 자식들이 혼인하고 손주가 태어났다. 시어른들이 돌아가신 발자국에 새로운 생명이 봄날의 새싹처럼 돋는 것을 보며, 삶의 역사가 후대로 흐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르마 반듯하게 쪽진 내 정수리에도 흰 머리가 늘어나고 세월이 남긴 옹이마다 슬픔과 웃음이 직조(織造)를 짰다.

↑↑ 모친 생신날 축하차 모인 가족들과 함께, 가운데 안경쓰신 분이 심갑자 님
ⓒ 고성신문
# 심갑자(1936년생. 86세) 시각 장애인의 삶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장질부사에 걸렸답니다. 열이 펄펄 끓어 불덩이 같은 몸으로 병원에 갔지만 눈이 멀었지요.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 사는 이치에도 관심이 많은 꿈 많은 소녀에게 닥친 불운은 견디기 힘듭디다. 환하던 세상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칠 때 제 삶도 함께 여의어 간 게지요. 눈이 멀고부터 내 행동반경은 작은방과 마루에 국한되었고 화장실 가는 것과 어쩌다 마당의 평상에 앉아 볕을 쬐는 것이 전부였지요.
골목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귀담아 들었소. 덤벙덤벙 걸어오는 소리는 소꼴을 잔뜩 베어 지게에 지고오는 머슴 돌이의 발자국이고, 사부작사부작 거리는 발자국은 돌이어멈이 빨래터에서 돌아오는 소리, 어흠어흠 기침소리가 들리면 내 조부님 기척이었다우.
모친은 평상에 날 앉혀놓고 창문 바르고 남긴 창호지를 펴서는 참빗질을 해 주셨는데 머리밑이 시원하면서도 따갑디요. 서캐알을 손톱으로 톡톡 터트리며 내 귀밑머리를 얼러주시던 모친의 한숨 소리가 깊었지만 난 딴청을 부리며 가만히 있었다오. 스스로 몸을 치장할 별다른 능력은 없었지만 삼단같이 긴, 숱이 풍성한 머릿결이 유일한 내 재산이었소.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바람과 얼레빗질로 말려서 쫑쫑 땋아내리는 것이 내 소일거리였다우.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나도 어미가 되고보니 그 마음밭이 훤히 보입디다. 눈먼 딸이 먼 산만 하염없이 바라보는게 안쓰러워 대구 맹아학교에 입학을 시켜줍디다. 기숙생활을 하며 점자를 배웠고, 중학과정을 마친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점자책을 읽으며 세월을 엮었지요. 남들은 ‘눈이 안 멀었으면 여걸이 됐을 거구만.’ ‘총명함이 넘쳐서 눈이 멀게 된 게야.’ ‘우째 입은 그리도 청산유수인고.’ 라며 위로인지 놀림인지 모를 얘기를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합디다. 나는 아무 댓거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오. 눈 먼 병신 주제에 뭔 할 말이 있을테요? 설사 있다손 쳐도 내 주장을 누가 받아주기라도 할디요?
서른이 넘어도 내 삶은 강물처럼 잔잔히 흘러갑디다. 어쩌다 모친의 손을 잡고 한참을 걸어 대가저수지 앞에 서서 귀를 기울이면 물결음이 찰랑찰랑 내 귀를 스쳤지요. 물살의 출렁임이고 바람이 물을 만나 반갑게 마주하는 소리였지요.
어느 날, 청이 들어왔답디다. 삼산면 사는 진양강씨 소생 없는 댁에서 자식 낳아줄 사람을 찾는답디다. 내 모친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짝 맞춰 자식 하나라도 세상에 떨어트려 놔야지. 그 댁에 소실로라도 가서 배태(胚胎) 해 보거라.”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 인연을 맺었고 딸 셋을 낳았지요. 성님은 성격이 불같고 칼칼하기가 사내를 넘어서는 분이십디다. 딸 셋에 봉사 수발까지는 못하겠다며 친정에 살면서 득남하라 재촉하더니, 넷째로 아들을 낳자 젖떨어지기 무섭게 안고는 본가로 가십디다.
그 세월 모두 흘리고 나는 지금 요양원서 지내고 있소. 그 동안은 세 딸네와 막둥이 아들집을 오가며 살았수. 돌이켜보면 내 살아온 생이 저수지의 물결 같고 바람 같소. 물결은 바람을 만나 흔들리고 바람의 손짓대로 따르는 거 아니오? 때론 가볍게 때론 세차게 겉모습은 달라지는 거잖소.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소. 물결은 물결일 뿐이고, 바람은 바람으로 사는 거라우. 내 삶이 물결이었으니 바람이 되어준 모친과 동기간과 자식들, 남편이 고마울 따름이오.
다음 생에는 밝게 뜬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 눈에 오롯이 담으며 장애인의 설움을 떨칠라요. 나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 옆에서 도움주고 벗되는 삶을 살고 싶소.

↑↑ 시집 온 뒤에 한번도 이사하거나 떠나지 않은, 오래된 종가 앞마당에 비석을 세웠다. 대가면 연지리 심씨 가문의 역사가 이 네모난 비석에 모두 담겨있으니.. 차가운 돌에 적힌 망자의 이름자도 어머니의 가슴 안에서는 뜨겁게 살아있다.
ⓒ 고성신문
# 김미옥(1946년, 76세, 대가면 연지리) 9대 종부(宗婦) 미완의 길
제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딸 다섯을 낳으셨고 저는 큰딸로 태어났습니다. 충직하고 다정다감하셨던 아버지는 “미혼 여성의 삶은 간호사로 봉직함이 참된 길이다.”라며 딸들이 모두 백의의 천사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우리 세 자매는 간호사가 되었고 둘째는 독일로 떠났습니다. 저도 파독하겠다고 부모님의 허락을 구했더니 “너는 고국에서 동생들 거느리고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지”라며 불허하셨습니다.
제가 29살 되던 해에 30살 된 대가면 총각이 선을 보러 우리 집에 왔습니다. 대문 앞 감나무에 올라 “우리 언니 보러 오요?”하던 막내 여동생은 이화여대 법대를 나와 판사 남편을 만났지요. 부모님의 영을 쫓아 혼례를 치르고 시댁에 오니 친정집 분위기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딸 다섯이 도란도란, 알콩달콩, 호호깔깔거리던 30여년 세월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였습니다. 시댁은 18명의 식구가 방 3칸에 모여 살더군요. 시어머님, 눈먼 시누님의 5식구, 숙부님 7식구, 우리 부부, 시동생, 머슴 둘까지 왁자하게 모여 살았습니다.
종갓집은 명절과 제사 때가 되면 정신이 쏙 빠지게 바쁩니다. 마루에 병풍을 치고 제물을 차려놓으면, 서른 명이 넘는 제관들이 멍석을 깐 마당에서 祭를 올렸습니다. 저는 종부로 음복(飮福)을 할 때까지 몇 차례나 상을 거안제미(擧案齊眉)로 날랐습니다. 제관과 식구들의 음식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달님은 초승달에서 그믐까지 쏜살같이 변했고, 저는 식구들 건사하며 발밑을 살피느라 하늘 한 번 편히 올려다보지 못하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부엌에서 열일곱 그릇의 밥이 김을 올리는 동안, 국솥에는 한 동이의 국이 끓었고, 몇 보시기의 김치며 나물이며 젓갈이며 자반이 올려지는지 따지기에 벅찼습니다. 날마다 빨래는 넘쳐났고, 구멍난 양말 속에 알전등을 대고 기워야 하는 바느질도 쉴 틈이 없었지요. 그나마 시어머님은 손재주 좋으셔서 바느질이며 옷을 만드는 일을 도맡아 주셨습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집안에 시숙부님이 가장이 되어 모든 일들을 이끄셨지요. 시숙부님은 마산의 한약방에서 인근의 약재들을 모아 서울로 보내는 일을 맡으셨고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하시어 수십여 마지기의 논도 마련하셨답니다. 눈 먼 시누님이 낳으신 조카 넷에 제 아이 셋과 숙부님 댁의 조카들 넷을 숙모님과 손 맞잡고 키웠습니다. 책가방은 줄줄이, 도시락은 켜켜이, 신발은 나란히, 의복은 뒤죽박죽 야단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니 모두들 성인이 되어 뿔뿔이 떠나갔습니다. 이제 한 숨 돌리며 우리 식구끼리 도란도란 조용히 살으렸더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요.
세상에나~ 인물 좋고 성격 좋고 마음 착한 큰아들이 교회에 나가더니 서른 살에 주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저는 혼절했고 아들 따라 세상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귀 먹고 냄새도 못 맡는 신경마비 증세가 찾아왔고 식물인간인 채로 5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의 음성이 들리더군요. “어머니, 제가 보고 싶으면 교회에 나가세요. 기도하시며 하느님을 만나세요.”
독실한 불교 신자의 길을 걷던 남편도 더 이상은 저를 만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날마다 기도합니다. 비록 육신의 몸은 떠났지만 영혼은 좋은 곳으로 날아가서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기도하는 아들을 만납니다.
돌아가신 강분선 시어머님, 눈 먼 삶을 꿋꿋이 살아오신 심갑자 시누님, 우리도 머잖은 날 제 아들이 먼저 가 있는 그 곳에서 모두모두 만나 이승에서의 삶을 되짚기로 해요!
심씨 가문의 한 많은 세 여자가 오순도순 서로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위로하기로 해요!

 
ⓒ 고성신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21년 01월 18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스토리네이버블로그
이름 비밀번호
개인정보 유출,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지역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 법률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포토뉴스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상호: 고성신문 / 주소: [52943]경남 고성군 고성읍 성내로123-12 JB빌딩 3층 / 사업자등록증 : 612-81-34689 / 발행인 : 백찬문 / 편집인 : 황수경
mail: gosnews@hanmail.net / Tel: 055-674-8377 / Fax : 055-674-8376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남, 다01163 / 등록일 : 1997. 11. 10
Copyright ⓒ 고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함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백찬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