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에도 제가 가진 능력 고성을 위해 쓰겠습니다”
91년 입사 후 30년 농협맨으로 근무
2020년 12월 31일자 퇴임
고성읍 수남리 출신
농협 근무하며 주경야독 박사학위 취득
퇴임 후 강의하고 컨설팅하며 인생이모작 계획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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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농업인들과 함께 호흡했고 고향의 농업 발전을 위해 고민해온 시간이었습니다. 고향 농협에서 마무리할 수 있게 돼 의미가 더욱 큽니다. 함께 해준 모든 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 덕분입니다.” 양진석 NH농협 고성군지부장이 이번달 31일을 끝으로 농협을 떠난다. 1991년 입사한 후 30년만이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미역과 우무 따위를 팔았다. 없는 집 아들이었다. 대학 합격 후 아버지는 등록금과 국수 한 그릇 사먹을 돈만 쥐어 주셨다. 당신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을 테다. 그걸 아는 아들은 화가 나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되지, 싶었다. 그저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었다. 대학 졸업 후 축협에 시험을 쳤다가 낙방했다. 취업 재수 후에 농협에 합격했다. 어찌나 기뻤던지 수남리 구암마을 읍전개에서 고성시장 어머니에게까지 단숨에 뛰어가 합격소식을 알렸다. 양진석 지부장의 아버지도 농협 조합원이었다. 어릴 적 구암에서 읍시가지로 올라오면 항상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던 2층짜리 커다란 군지부 건물은 웅장해보였다. 농협 입사가 결정된 후 연수 시작까지 두어 달 여유가 생겼다. 주유소에서 기름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군지부에 배달을 다녔더랬다. 정식으로 군지부에 출근하던 날 기분은 더 남달랐다. “입사 후 2년이 지나면 승진시험자격이 생겼어요. 여섯 시에 퇴근하면 독서실에서 새벽 네 시까지 공부했습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서 라면 한 대접을 끓여주고 시장에 나가시면 저는 먹고 기절하듯 두세 시간 자고 일어나 출근하곤 했어요. 어린 시절 힘들게 자라서인지 원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내 월급으로 먹고 사는 일이 마냥 행복했습니다.” 입사 4년만에 4급으로 승진해 거제시지부로 발령받았다. 군지부에 입사해 승진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거제에서 9살 아래인 아내를 만나 96년 결혼했다. 이듬해인 1997년 IMF 사태가 전국을 휩쓸었다. 업체들이 힘없이 픽픽 쓰러져갔다. 당시 양진석 지부장은 여신과장이었다. 자금이 돌지 않으니 힘들었다. 몇 번이나 사직서를 만지작거렸다. “IMF 시기가 제 인생 최고의 위기였습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니 차마 사직서를 내지는 못하겠더라고요.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지, 하며 버텼습니다. 98년에 고성군청 출장소장으로 왔는데 고향이라 그런지 숨통이 틔는 거예요. 또다시 뛸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2001년부터는 경남지역본부 홍보차장으로 근무했다. 양곡을 담당할 당시에는 수입쌀 개방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 쌀의 우수함을 알린다면 수입쌀이 들어오더라도 큰 타격이 없겠다 싶었다. 우리쌀과 관련된 내용으로 창원대 석사를 준비했고 마침내 우리쌀 이야기로 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3급으로 승진한 후 고성군지부 총무팀장으로 다시 고성으로 왔다. 직급마다 고성을 찾은 셈이다. 고성군청 출장소에 근무하면서 사람도 많이 사귀었다. 창원 문성대 지점장과 창원시청 출장소장, 용지지점장, 김해진영지점장, 김해내외동지점장을 거쳤다. 문성대도 용지지점도 폐쇄가 예정된 지점이었다. 근무하는 동안 문성대와 용지 모두 1, 2등으로 변신시키고 흑자지점으로 돌려놨다. 꼴찌를 면치 못하던 진영지점은 상위권으로 끌어올렸다. 2018년 다시 고향 고성으로, 이번에는 지부장으로 부임했다. 농정협력을 위해 뛰었다. 눈 깜짝할 사이 3년이 훌쩍 지났다. 고성군농업기술센터와 농협이 2개월에 한 번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게 했다. 덕분에 고성군농업인월급제도 시작할 수 있었다. 군과 협력사업을 통해 지부장 부임 첫해 12억2천500만 원이었던 농가소득을 지난해에는 세 배가 넘는 74억4천800만 원으로 만들었다. 수남리 구암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성초, 고성중, 고성고를 졸업했다. 아버지도 그랬고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그 역시 내 일보다 남의 일이 더 즐겁다. 사람을 워낙 좋아한다. 고향 사랑도 남다르다. 사람이 모이는 게 즐거워 거제에서 근무할 때 거제향우회로 시작해 창원에서는 창원향우회 사무차장도 했다. 경남향우연합회 발족을 위해 나섰다. 지금 전국향우회연합회의 시작이 됐다. 창원시청 출장소장을 하면서는 고성 출신 공무원들 사이에 다리를 놓고 공무원향우회를 꾸리는 데 앞장섰다. 창원향우들 사이의 연락병이자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올해 개최 예정이었던 공룡엑스포 입장권 판매를 위해 도내 전 시군지부와 지점을 바삐 다닌 끝에 군이 부탁했던 1만 매보다 2천300매 더 판매할 수 있었다. 올해 초 아무도 예상 못한 코로나19로 마스크대란이 벌어졌을 때 군과 협력해 비축해둔 마스크 1만7천매를 풀었다. 덕분에 군으로부터 자랑스러운 고성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90년대 농협별로 한창 밤 사업을 많이 할 때였다. 주말에 아버지의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마암, 개천, 영오 현장을 찾아 일을 도왔던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옥천사를 지나 개천면 굽잇길을 지나던 중 오토바이가 계곡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정신을 잃었다. 몇 시간이나 그대로 쓰러져있었다. 차도 사람도 지나지 않는 길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오른쪽 얼굴은 모두 갈리다시피 했고, 앞니는 다 부러져 있었다. 자칫하면 머리를 다치거나 척추를 다쳤을 수도 있었다. 천운이었다. “그 사고 후부터 저는 덤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진영에서 근무할 때 퇴직 후 미래를 그려봤습니다. 고민이 되더라고요. 경영지도자 자격증을 땄고,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6년동안 휴가도 못가고 주말이면 새벽 두세 시까지 공부했어요. 수험생인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많이 했네요. 이래저래 큰 열매를 거뒀습니다.” 휴가 7일에 주말 이틀을 더하면 모두 9일의 휴가를 얻게 된다. 그럴 때면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아들들이 아버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공부하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아이들도 이제 제몫을 든든히 해낼 만큼 성장했다. 그동안 양진석 지부장도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올해 2월 ‘모바일뱅킹서비스가 자기효능감, 조절초점이 지각된 가치와 행위의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문으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이들도 다 컸고 퇴직까지 하면 쉬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도 양진석 지부장은 여전히 일하고 싶다. 이번에는 오롯이 고향 고성을 위해 일하고 싶다. “혼자 잘한 일도 아니에요. 백두현 군수님, 박용삼 의장님과 군의원 여러분, 농민단체를 비롯한 군민여러분, 누구보다도 농민조합원들이 도와주신 덕에 마음껏 일할 수 있었고 감사한 마음으로 퇴직하게 됐습니다. 뭔가를 알아간다는 쾌감이 즐겁습니다. 퇴직한 후에도 1인 지식기업처럼 강의도 하고 컨설팅도 하면서 제가 가진 능력을 고성을 위해 쓰겠습니다.” |
최민화 기자 /  입력 : 2020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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