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욕심으로 꽃을 피우지 말라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9월 15일
 |
 |
|
ⓒ 고성신문 |
17년 전, 고성의 3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고룡이 청소년봉사단’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때는 공교육에 봉사활동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당연히 봉사 점수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려운 이웃에 작은 도움을 주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학생들만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2010년을 전후로 교과과정에 학생자원봉사 개념이 도입되면서 봉사시간이 점수가 되고 진학에 영향을 끼치는 필수 활동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때부터 생겼다. 청소년 인성 교육을 목적으로 도입한 제도인데도 불구하고, 청소년 봉사동아리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학교 단위로 형식적인 봉사시간 채우기 등의 부작용이 생기면서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진 것이다. 고룡이 청소년봉사단 역시 그 소용돌이 속에서 시련을 겪었다. 점수를 받기 위해 동아리에 가입하는 학생들이 생기고, 회원 선발 과정에서 학교가 개입하거나 자신의 아이를 가입시켜주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부모까지 있었다. 봉사를 생활화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이 도리어 봉사의 의미를 퇴색시켜버린 것이다. 학생 체험 활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진학에 급급하여 교과서를 외는 능력 외의 능력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에, ‘새교육공동체 고성주민모임’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뿐만 아니라 과학, 문화, 통일, 체육, 역사 등 다양한 주제로 체험 활동을 시행했다. 새교육공동체의 체험 활동 프로그램은 지식 외에 건강한 몸과 인성을 갖추는 데 많은 도움이 되어 다른 지역에서 벤치마킹해갈 정도로 내용이 알찬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교육과정에 ‘창의적 체험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도입되어 점수화되면서 본래의 취지가 변질하였다. 그와 유사한 사례로 복지 제도를 들 수 있다. 6·25 전쟁의 상처가 많이 남아 있던 60년대까지만 해도, 깡통을 들고 문 앞에 서서 ‘밥 좀 주이소.’하고 외치던 거지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시 누가 넉넉했으랴? 다들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집에 찾아온 거지를 그냥 보내지 않고 밥 몇 숟가락에 김치 조각을 얹어주곤 했다. 그러면 거지는 몇 번이나 고개 숙여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물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지만, 그때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깡통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노숙인을 위한 무료급식소가 있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구호품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한다. 다행스럽게도 사회 복지의 개념이 생기면서 예전과 같이 밥을 빌어먹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에서 어려운 사람을 제도적으로 챙기고 살펴준다. 가진 자들도 여유가 생겨 달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내놓는 기부 문화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는 것이 불편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기부 문화가 사회 복지의 제도화로 인해 변질하고부터이다. 예전의 우리 어머니들이 자신도 어려우면서 거지에게 밥을 퍼준 이유는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의 소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밥 한술 나누는 베풂을 알고, 받는 사람은 고마움을 알았다. 물론 베푸는 사람이 인사나 보답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진 사람은 내놓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되어버렸고, 없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베풀고도 욕 듣는 경우가 있다. 가끔 사회단체 회원들과 함께 노약자나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가정에 봉사활동을 가곤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으면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요구를 한다. 간혹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엔 참 황당하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건강, 윤택한 생활, 안락한 환경들이 어우러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 국가에서는 사회 복지 개념을 도입하여 국민의 생활 안정 및 공중위생, 사회 보장 제도 등 복리를 향상하기 위해 힘쓴다. 그러나 그 정책의 운용에 철학이 없다면 문제가 있다. 단순히 가진 사람의 것을 받아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는 기계적인 정책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소통을 마비시킨다. 특히 역대 정권들이 대중적 인기를 위해 남발한 포퓰리즘은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여기게 하고,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고 보면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만을 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길들였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자신이 가진 작은 여유를 남에게 베푸는 봉사의 의미를 망쳐 버렸고, 어려움 속에서도 주는 즐거움과 받는 고마움이 있던 어머니와 거지의 인간관계를 망쳐놓았다. 이제 당신들이 변질시켜버린 복지는 의미가 없다. 봉사활동이 점수화되면서 봉사의 참 정신이 없어졌듯이, 복지 혜택의 남발로 복지의 본질이 훼손되었다. 주고도 불편한 사회,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사회는 잘못된 복지 사회이다. 이제 잘못된 복지의 개념을 처음으로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 나누어 주어 행복하고 도움을 받아서 고마운 복지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제 위정자들은 민간에서 시작된 이런 순수한 활동을 앞에 서서 좌지우지하는 일을 않으면 좋겠다. 봉사나 복지의 생활화는 정말 좋은 정책이다. 당연히 정책을 만들고 도움을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문제는 위정자들이 손을 대면 이상스럽게 변질하여 버린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냥 두는 것이 낫다. 꽃은 때가 되면 절로 핀다. 빨리 피우려고 잡아당기면 죽거나 기형적인 꽃이 되고 만다. 그대로 두라. 순수한 마음은 그냥 그대로 두고 지켜보라.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그들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하라. 왜 그들을 이끌려고 하고, 그들의 활동을 당신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하는가? 당신들이 손대는 순간 꽃은 색을 잃고 마음은 순수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9월 15일
- Copyrights ⓒ고성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가장 많이 본 뉴스
만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