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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섬竹島에 숨겨진 이야기


하기호(고성문화원향토사연구소) 기자 / 입력 : 2006년 12월 18일

고성읍 서외리 오거리에서 남쪽 수남리 남포 쪽으로 가는 도로가 새로 개설되었다. 이 오거리에서 남쪽으로 약 500m쯤 사거리 교차로가 있고,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고성군보건소 방면 오른쪽에 아주 낮은 자그마한 산과 같은 언덕이 있는데 이 곳이 대섬(죽도:竹島)이라는 섬()이다.


 


남북으로 약 150m 동서로 약 40m의 돌섬으로 지금은 바다를 매립했기 때문에 육지가 되었지만 옛날 1904년 간척지 제방공사를 시작하여 완성되기 그 이전에는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이었다.


 


1886김정호(金正浩)가 지은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고성편(固城編)에는 대섬(竹島)은 한편은 열락산(悅樂山)이라 하며, 남문(南門) 밖에 있는데 섬에는 대()가 가득하다.(竹島一云悅樂山在南門外滿島皆竹)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옛날에는 이 숲속을 갈가마귀 떼가 몇 백 마리씩 날아와 서식 하던 곳이었다. 바다로 둘러 싸여 있을 때에는 섬 지방에서 고기잡이배가 들어와서 정박하고 물물교환도 하였으며, 태풍이나 큰 바람이 불 때면 많은 선박들이 대피하던 곳 이었고, 경치가 좋아서 수많은 시인이 거쳐 가던 곳이기도 하였다.


 


신라 42대 흥덕왕 3(828)에 김양(金陽)은 고성군(固城郡):지금의 固城)의 태수(太守)가 되어 고성으로 부임하였고, (삼국사기 권제44, 열전제4, 김양(金陽)) 이곳 대섬에 ‘낙열정(樂悅亭)’을 지어 거처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김양은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9대손으로 증조부는 주원(周元) 이찬이요, 조부는 종기(宗基) 소판(蘇判), 아버지는 정여(貞茹) 파진찬이니 모두 대대관록이 있는 집안으로 장상이었다.


 


그 후에 김양의 행적을 살펴보면 흥덕왕이 돌아가자 적장자(嫡長子)가 없어 당제(堂第:4) 균정(均貞)과 당제(堂第:憲貞 )의 아들 제륭(悌隆)이 후사(後嗣)를 다투었는데 김양은 균정을 받들었으나, 836년 김명(金明)이 제륭을 왕으로 받들어 즉위하게 하니 43대 희강왕(僖康王)이다.


 


김명은 상대등(上大等)이 되고, 838년에는 희강왕을 시()하고 스스로 왕에 즉위하니 44대 민애왕(閔哀王)이 되었다.


 


이에 김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에 들어가 우징(右徵) 아찬을 배알하고, 대사(大使) 궁복(弓福) 장보고(張保皐)와 거사를 모의하고 군사를 이끌고 대구(大丘)에 이르러 왕군을 격퇴하고 왕을 살해한 후 우징을 맞아 즉위케 하니 이가 곧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이다.


 


김양은 반정공로로 소판겸 창부령(倉部令)을 제수 받았다. 그 뒤 이찬에 오른 그는 847(문성왕 9) 8월 시중이 되어 이듬해까지 재임하였고, 시중 퇴직 뒤에는 병부령(兵部令)에 전임 하였다.


 


김양은 대중(大中:唐宜宗 ) 11(大聖王 19년 서기 857) 8월에 사제(私弟)에서 돌아가니 향년 50세였다.


 


대왕은 부음을 듣고 애통해 하며 서발한(舒發翰:大角于 )을 추증하고, 12월에 태종 무열왕릉의 능열(陵列)에 배장하였다.


 


고문헌에는 김양이 거처하던 낙열정에 관한 서거정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곳 죽도에는 고려 말엽에 홍건적을 토적(討賊)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정절공(貞節公) 허기(許麒)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정절공 허기 선생은 고려 말엽 때 사람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호는 호은(湖隱)이고,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고려 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충목공(忠穆公) 유전(有全)의 손자이다. 어릴 때부터 입지가 비범하고 재지(才智)가 총명하였다.


 


공민왕(恭愍王)10년 신축년에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은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이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록훈(錄勳)하고 익위장군 보승 중랑장(翊威將軍保勝 中郞將)으로 배임하였다.


 


그 뒤 고려 말기의 문신 이존오(李存吾) 석탄(石灘)은 신돈이 정치에 관여하여 기강을 어지럽히는 죄를 소론(疏論)하여 참할 것을 청하니 왕이 대로하여 석탄을 중벌로써 다스리게 하니 공이 분주히 상주하여 구하려다가 고성의 죽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신돈이 복죄(伏罪)하게 됨으로 왕이 귀양에서 불렀으나, 끝내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후 혁명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후 다시 중용하려 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를 몸소 실천하여 두문불출 세상을 등지고 고성읍 죽도에 은거하였으며, 그 뒤에 마암면 장산에 터를 잡고 살면서 야은과 이목은과 의가 서로 맞고 출처가 합()한고로 늦을 즈음 강호에서 상교하면서 마음이 서로 얽혀서 잊지 못하였다고 하며, 공은 시()에도 뛰어난 재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후세에 사림들이 공의 유풍을 흠모하여 도연서원에 향사를 받들었고, 송도마전 숭의전에 공민왕과 종향되고 있으며, 고성읍 수남동 죽도에 유적비가 있고, 마암면 장산에 유허비가 있으며, 공의 수식림인 ‘장산숲’이 6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남아있다.


 


조선 말엽 고성부사로 있었던 오횡묵의 「총쇄록」에 “서쪽에는 죽도가 있어서 옆으로 누워 있는 형상이 거북의 등어리 같아서 바다의 조수에 할퀴고 살켜서 돌 덩어리가 완전히 드러나다.


 


북쪽으로 비탈지고 남으로는 가파른 절벽이다. 옛날에 낙열정이 있었는데 정()의 자리에 사람들이 사는데 호수가 10여 호나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집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육지로 변한 대섬은 지난날 1천여 년 동안의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육지의 섬으로 남아 있다.


 


※ 낙열정에 관한 서거정의 시


 깍아 세운듯한 소도는 창해가에 들어가고


묶어놓은 것 같은 대는 푸르기가 무성하구나


대밭을 뚫고 들어가 반석 위에 앉으니


한 번에 만고의 속세의 마음을 써구려


동쪽에 해가 뜨니 산호처럼 붉고


만경파도에 비늘같은 물결은 금빛이구나


눈 속에 누른 귤은 별을 달아 맨듯한데


홀연히 한쌍의 물총새가 날아오구나


또한 묻노니 신선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삼신산의 금오두는 지척에 있구나


자진(子晋)을 불러 학을 타고 피리를 불리고자 한다면


십이동천의 맑은 놀이를 다하리라


아래로 구주에 놀다가 다시 구주로 돌아오니


삼천세계에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구나

하기호(고성문화원향토사연구소) 기자 / 입력 : 2006년 1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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