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에 이는 바람처럼 흘러가 버린 세월 구만면 촌길 걸어 처가 가던 그 때가 생각나오
이도갑 회화면 봉동리 출신(93세)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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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곁 대나무밭에 이는 바람을 마중하러 마당에 앉았다. 뜨건 여름 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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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 아침에 며느리가 오이냉국을 맹글어 상에 올립디다요. 미역도 자잘하게 썽글어 넣고 땡초도 한 개 다져 넣었는지 맵사리함서 씨원합디다. 이거 여름 되모 할멈이 자주 해 주던 음식 아인가요. 내는 국이 엄서모 밥을 못 묵는다는 거 아인께네. ‘날 뜨거버모 불 옆에 서서 음식 맹그는기 을매나 힘드는 줄 아나’ 지청구함스로도 매 끼니때마다 국 끓여댄다꼬 욕봤소. 어제 큰며느리가 옴서 장어국캉 소고기국캉 봉다리봉다리 싸와서 냉동실에 넣어놨소. 조석으로 한 봉지씩 끓여서 밥하고 김치하고 멸치 볶은거 하고 무모 돼요. 큰아들 내외는 아침에 일찍 일나서 붉은 고추 따서 말란다꼬 마당에 엎디려 있습디다. 있는 밭인께 묵히지도 몬하고 해마다 고추를 심어서 1년 양념하고 김장에 쓰고 형제들 농갈라 주고 합디다. 올해는 장마가 하도 길어서 온 세상이 꿉꿉하요. 마당 구석 물이 잘 안빠지는 데는 이끼도 끼고, 고인데는 장구벌레도 씨리샇으니 내가 아침마다 마당을 잘 쓸고 있소. 혹시라도 자빠지지 않도록 단도리 잘 하고 있응께 걱정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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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 전, 마당에 나란히 선 부부 이도갑 님과 이경점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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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 내는 회화면 봉동리 동촌부락에서 7남매(아들 둘, 딸 다섯)의 맏이로 태어났소. 내 아부지 고향도 여기라쿵께 대대로 살아온기요. 아부지가 부지런하셔서 일을 많이 쳐냈다 카디요. 남의 집 일도 엄청시리 해 주고 돈을 악착같이 모아서 논과 밭을 일군 분이시오. 어렸을 때부터 아부지 일하시는 것 봤응께 내도 보고 배운대로 살았소. 새벽에 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신 아부지는 지게 지고 들로 나가시었소. 밭둑을 거니시며 소꼴을 베시고, 논두렁콩이 얼마나 잘 크는지 보신다꼬 논둑에 나가셔서는 발자국 도장을 콕콕 찍으시었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고여서 나락이 잠길까 싶어 봇도랑으로 물꼬를 틔우시고, 가뭄이 심하모 웅덩이 물을 떠올리신 기요. 내는 큰아들인께 아부지가 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했소. 아부지가 낫질을 하시면 따라서 풀을 베고, 아부지가 봇도랑을 치면 따라서 도랑을 쳤소. 그 때는 미꾸라지도 많았고 민물게도 많았소. 암매도 ‘도랑치고 가재 잡는다’는 말이 그기서 나온기 아인가 싶소. 도랑물이 고여 물풀들이 자라는 뻘구덩에 미꾸라지가 살았소. 내 어무이는 미꾸라지를 삶아서는 호박잎을 비벼 넣은 추어탕을 자주 끼리 주시었소. 묵을 끼 없던 시절이라 미꾸라지탕이 을매나 맛나든지 입이 깨금을 뛰디요. 몇 마리 남겨뒀다가 부침개를 굽어 주시었소. 참 맛나던 음식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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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여 년 전, 형제 자매와 사촌들 내외가 동네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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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 요새는 그 맛이 안 나요. 묵을 기 쌔비맀는데도 맛이 별로요. 내 입이 변했는지, 세월이 변했는지 모리것소. 이웃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모 암매도 배고픈 시절이 다 지나서 입이 옛날만큼 달지도 않고, 맛난 음식들을 하도 많이 무서 입을 베릿다고도 안 하요. 그래도 배 안 곯고 묵고 지븐 거 실컷 묵음시로 살아간께네 다행이기도 하요. 내는 여즉지도 입이 짧아서 아무거나 안 묵소. 내 묵던 것만 묵고, 내 하던대로만 하고, 넘한테 폐를 안 끼칠라카요. 할멈 저 세상으로 떠나고 나서 큰며느리가 욕을 마이 보요. 내보고 큰아들 부부가 사는 창원의 무슨 아파트에 가서 항꾸네 살자카는데 될 말이요? 내 평생을 이 동네서 살았는데, 이 좋은 곳을 냅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요. 그라모 요양보호사를 부르자 캅디다. 단호히 안된다고 했소. 내가 안즉 혼자서 살살 꿈직이고 사지 멀쩡한데 만다꼬 넘한테 수발을 받을끼요. 그카고 할배 냄새 폴폴 나는 내를, 아무리 돈 받고 한다캐도, 가당키나 하긋소? 그래서 며느리가 애묵소. 내 혼자 시골에 있으니 끼니는 지대로 챙겨묵는지, 빨래는 우짜는지, 아픈데는 없는지 날마다 챙기요. 큰아들이 퇴직하고 집에 있으이 자주 와서 들다보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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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가 마당에서 조부님의 회갑연이 열렸다. 앞줄 갓 쓴 노인의 옆에 선 소년이 이도갑 어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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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점할멈. 가만 생각하모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인갑소. 내가 태어난 것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일인께네 부모복은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끼요만, 내는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소. 사람이 한평생을 건강하고 웃음시로 살라 카모 몇 가지 복이 있어야 하는데 내는 복을 많이 지녔구나, 싶소. 첫째가 처복이요. 내가 열여섯 되던 해에 구만에 사는, 이씨에 경점이라쿠는 이름을 가진 처자와 혼인을 핸 기요. 요새 같으모 얼라거튼 나이에 내한테 시집을 온 기요. 아들 셋에 딸 셋을 낳아 키운다꼬 욕 봤소. 시부모님 두 분이 아흔 넘어 돌아가셨으니 그 분들 모신다꼬 애썼소. 경상남도지사님이 주시는 효부상도 받았응께 넘들이 치사를 해 준거 아이것소? 할멈은 성격이 어질고 좋은 사람이었소. 내야 워낙에 깐깐하고 에누리 없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응게, 그 수발한다꼬 속이 숯껌정이 되었을끼요. 내는 어느 물건도 제 자리에 있어야 하고,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는 성질이 아니었소. 새벽같이 움직이다가 아무리 피곤해도 요이불 펴고 낮잠을 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요. 자석들이 그캅디다. “우리 아부지는 앉아서 주무시는 분이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서 주무시는데 아무리 누워서 편히 주무시라 캐도 안 듣는 고잽쟁이야.” 그란디 내는 앉아 있는기 좋은데 우짜요? 그기 평생 살아온 내 습관인데 자식들이 뭐라칸다꼬 내가 들을끼요? 할멈은 내한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도 안 했고, 내가 하자는대로 순하게 따라와줌서, 자식들 모두 예의범절 잘 가르치며 키웠으니 감사하오. 그래도 이 좋은 세상, 좀 더 살지, 만다꼬 팔십 여섯에 바삐 세상 떠났을꼬?
할멈. 둘째가 자식복이요. 내는 복이 많은 사람이요. 우리가 3남 3녀를 낳아 키웠는데 큰아들이 순하고 착한 사람이요. 며느리는 동해면 사람인데 뼈대 있는 가문의 여식으로 자라 우리 집에 시집을 왔던 기요. 형제 많은 집안의 맏이로 자라, 처녓적에도 동생들 키운다꼬 힘들었을 터인데 또 우리 집에도 맏며느리로 와서 다섯 동생들 수발하고 챙겨서 시집 장가 보내는데 손 보탠 고마운 사람이요. 큰아들이 직장 다님서 신마산 제일여고 옆에 방을 얻어 사니까 동생들이 마산으로 나갈 때마다 델고 있었소. 듣자하니 친정 동생들도 챙겼다 하더이다. 하숙비 없는 하숙을 얼마나 쳤던가 싶소. 우리야 농사지어서 쌀과 보리쌀 챙겨 보내고, 철따라 나는 채소며 곡식이며 양념 보내는 것으로 하숙비 냈지만, 사람 사는데 드는 돈이 어디 그 뿐이것소. 그래도 군말 없이 다 챙겨주고 받아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오. 내 어무이도 밭에서 키운 남새이파리들을 보따리보따리 싸서 손주며느리한테 갖다주곤 했잖소. 우리 큰며느리가 할무이하고도 잘 지냈소. 심지가 무던하고 착하니 모두가 치사를 하며 사이가 좋았던 기요. 우짜든지 집안은 큰기 잘해야 작은 것들은 따라가게 되어 있소. 할멈이 우리 형제들한테 한 것만큼, 며느리가 또 아래 사람들한테 베풀고 챙기는게요.
할멈. 셋째가 건강이요. 우짜믄 첫째 순서와 바꿔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소만, 내는 고마 이렇게 말할끼요. 우리 집안 사람들이 장수하는 편이오. 내 형제들도 아직 살아 있소. 여동생들은 어찌나 팔팔한지 새댁같소. 한번씩 큰오빠 잘 계신지 안부를 묻고 맛난거 사서 들리기도 하오. 동생들 만나면 옛날이야기 함서 실컷 웃소. 할멈 칭찬은 한 보따리씩 풀어놓고, 어쩌다가 험담도 몇 마디 하요. 칭찬은 당연한데 험담이라카이 무섭소? 할멈이 평소에 말씀 없이 조용하던 거하고, 오빠 혼자 놔뚜고 먼저 떠난 거를 아쉬워하니, 그거이 싫은 소리요. 고성장에 같이 가서 우뭇가사리 고아서 맹근 묵캉 콩국도 사 묵고, 명태대가리 찌짐도 같이 묵고지븐데 와 빨리 떠났는고, 함시로 아쉬워서 울먹입디다. 내는 남정네인데 따라 울지도 몬하고 그 소리 들음서 헛기침만 킁킁하지 뭐할끼요? 내는 안즉 혼자서도 잘 움직이고 밥도 천천히 끓여먹고 사니, 건강은 타고 난거 같소. 기억력도 총총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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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년도 더 된 제대증과 병무소집해제증, 신고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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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멈. 내보고 군대 이야기를 해 달라캐서 생각난기 있어서 큰방 서랍장에 넣어둔 상자를 꺼내봤소. 거기에 입대했던 서류하고 제대증까지 모두다 들어 있소. 며느리가 그걸 보더만 이캅디다. “아이구, 아버님, 이기 언젯적 서륩니까? 누렇게 변해서 고문서가 되었네요.” 내가 입영 영장을 받아서 경기도 포천서 근무하다가 의가사 제대를 했소. 시골에 부모님이 계시고 농사를 짓고 사는 큰아들이라꼬 국방의 의무를 1년만 하다가 집으로 돌려보내 준기요. 그 때 제대증을 보여주면 버스도 반값이고, 난중 군에서 이것저것 보여달라고 할 때 증명이 되던 기요. 요새 같으모 주민등록증과 같은 증명서요. 내가 그걸 꺼내 보니 젊은 청년 시절이 생각나요. 우리 때는 차도 없었으니 걸어 댕기는기 일이었소. 할멈이 친정에 간다쿠모 내가 배둔 장에 가서 비린내 나는 생선을 몇 마리 새끼줄에 끼워서 들고 따라가던 생각이 나요. 처갓집 구만면은 얼마나 산골이던지. 우리 살던 회화면에서 두세 시간을 꼬박 걸었소. 요새 사람들은 부부들끼리 다정히 팔짱도 끼고 오순도순 이바구도 함서 댕기는데, 우리 젊던 시절은 내가 앞서서 멀찍이 걸어가믄, 할멈은 뒤에서 순순히 뒤따라왔소. 다리가 아파서 자꾸 뒤떨어지모 내는 당산나무 아래서 한참을 쉬다가, 할멈이 쉬어갈 짬도 안 주고 또 내쳐 걸었소. 지금 생각해 보모 부끄럽고 미안하오. 살면서 다정한 말도 몬해주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만 하고, 살았던 거 같소. 내가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라 물건들을 제자리에 정리정돈을 잘 하잖소. 지금도 장롱위에 박스를 만들어 거기다 이것저것 챙겨 놨소. 마스크, 소독약, 장갑, 앨범, 서류함 등등이 모두 제자리에 있소. 그런 성격 따라한다꼬 말도 몬하고 애썼을거 내 다 알고있소.
경점씨요. 어젯밤엔 대밭에 바람이 셉디다. 대들이 휘휘 한쪽으로 몸을 뉘며 일으키는 소리를 들었소. 내가 저 소리를 구십 세 해 듣는 갑소. 그 사이 을매나 많은 대들이 베어지고 새롭게 자랐겠소? 예전에는 쓸모가 많아서 귀하던 대나무인데, 요즈음엔 바람이나 델고 사는갑소. 대나무와 바람이 내는 소리를 들으모, 내도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된 것 같기도 하요. 사람이 너무 오래 살아서 좋을게 뭐 있을끼요. 인자는 대나무숲에 듣는 바람소리처럼,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맘이요. 할멈이 내를 기다리고 있을테니, 내 맘 편히 떠날 길 닦으며 남은 날을 살아 갈끼요.
할멈, 우리 또 만납시다. 내 자식들 모두 건강히 잘 살고 있으이 아무 걱정 마시고 내만 기다리고 있으소. 2020년 뜨거운 여름 날, 회화면에 사는 영감 도갑이가 보내오. |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  입력 : 2020년 0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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