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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의사가 있는 거류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한반도 지형을 닮은 당동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당동만을 마주보고 왼쪽에는 이순신 장군이 왜선을 격침한 적진포가 지척이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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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류산의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한다. 1757년부터 1765년 사이 조선시대 각 읍에서 펴낸 읍지를 모은 ‘여지도서’에는 “유민산(流民山)은 관아의 동쪽 15리에 있다. 민간에서는 거류산이라고 부른다. 벽산에서 뻗어 나온다고 하였다”고 했다. 18세기 제작된 영남지도에도 거류산은 유민산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지도’, ‘광여도’에는 유민산, ‘1872년지방지도’에는 지금과 똑같은 거류산이다. 고종31년 당시인 1894년 발간된 ‘영남읍지’에는 거류산이 “동쪽 10리에 있다. 상봉(上峰)에 석정(石井)이 있다”고 했다.
아주아주 옛날에 이 동네에 살던 아낙이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 이게 웬걸, 집앞 산이 바다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아닌가! “저기 산이 걸어간다!”고 소릴 내질렀더니 산도 놀랐던지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서 ‘걸어가던 산’이라는 뜻으로 ‘걸어산’이라 부르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거류산이 됐다나.
거류산은 소가야시대에는 태조산(太朝山)이라 불렀고, 조선 초기에는 거리산(巨吏山)으로 조선말엽에는 거류산으로 부르게 됐다. 큰 고을의 산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거리산이라니 산아래 동네에 큰 벼슬이 많이 난다는 의미일까. 이름부터가 과연 명산은 명산이다. 그러고 보니 거리산이 거류산으로 변했을 법도 하다.
거류산은 해발 572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멀리, 한내삼거리쯤에서 보면 장엄한 봉우리 세 개가 마치 소가야왕조를 상징하듯 금관의 모양을 하고서 위용을 뽐낸다.
거류산 중턱에는 자그마한 절집 하나가 있다. 고성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 장의사(藏義寺)다.
장의사 일주문을 지나기 전 주차장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당동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부의 거북바위에서 보면 당동만은 한반도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동만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화당리다. 화당리는 이순신 장군의 적진포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작은 절집은 1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한반도를 내려다 보고, 임진왜란을 지켜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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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의 숨은 절집 장의사 뒤쪽에는 야생차밭이 펼쳐져 있다.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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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성 최고(最古) 사찰
장의사는 고성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해탈의 염원을 품은 절집, 장의사는 ‘고성부거류산장의암중창기문’에 632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기록돼있다.
그러나 절집에 전해오는 사적이 없으니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장의사 뒤 거류산 줄기를 더듬다 보면 자그마한 굴이 있다. 신도들은 아마도 그 굴이 원효대사가 기도하던 곳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도 한다.
1885년 수해로 가람은 소실됐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의 위치는 1891년 성담 법운 대사가 중수한 것이다. 1920년에는 법정 스님의 스승인 호봉 스님이 중건했다.
당시 장의사는 안정사의 말사였다. 그러나 안정사가 법화종으로 분리돼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쌍계사의 말사가 됐다.
절집으로 향하는 길은 여럿이다. 그 중 용동마을에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난 작은 길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늦은 봄볕에 점점이 반짝인다. 익숙하지만 알 수 없는 새소리와 때죽나무, 백화등 꽃잎이 길섶을 덮고 있다. 거류산 중턱의 절집, 장의사를 찾아가는 길은 여느 산사를 찾아가는 길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절집 앞 불이교를 지나 종무소인 운해당 곁에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을 등지고 내려다보니 아스라이 당동만과 마을들이 눈에 들어온다. 절경이랄 것까진 없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고항이다.
보광전에는 17세기 후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관음반가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1호)이 봉안돼있다. 천년이 훌쩍 넘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장의사지만 그간 무슨 사연들을 겪었는지 남아있는 문화재는 이 석조관음반가상 하나뿐이다.
반가상은 오른다리를 왼다리에 올린 반가좌를 하고, 두 손은 나란히 두고 있다. 보타 가락산에 있는 관음보살상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그 모습이 흔히 봐오던 불상과는 조금 달라보인다.
관음보살이 앉은 대좌와 불상은 희고 무른 한 돌로 제작됐다. 외관은 파손되지 않았지만 복장물을 넣는 장방형의 복장공은 있지만 내부는 텅 비어있다. 누군가 복장물만 꺼내가고 불상은 내버려둔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주로 해안의 절집에 많다고 한다. 적의 침입이 주로 바닷길을 통해서였고, 바다에서 생업활동을 해야 하는 까닭에 사부대중의 무사안일과 평안을 비는 불교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보광전 오른쪽에는 너른 마당을 두고 천불전이, 보광전 오른쪽 좁다란 계단 위로는 사성각이 있다. 사성각과 보광전 뒤로는 해풍을 맞고 대나무숲 소나무숲 이슬을 먹고 자라는 죽로다전이 있다.
몇 해 전 국립산림과학원 야생차연구팀이 남부지방 야생차나무들의 성분분석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장의사 뒷산 죽로다전의 차가 카테킨, 탄닌 함량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고 품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의사의 창건시기와 차밭의 규모를 보면 우리나라 차 시배지인 쌍계사 차밭보다 200년쯤 앞섰을 거라는 이도 있다.
운해당 옆 작은 돌다리가 눈에 띈다. 백운교, 이름만큼이나 하얀 돌다리를 건너면 부도탑과 자연보탑을 만난다. 좁은 돌계단을 계속 걷다 보면 산너머의 엄홍길전시관까지 닿는다.
산 정상에서는 한반도 형상을 한 당동만을 조망할 수 있다. 바로 옆은 이순신 장군이 승전고를 울린 적진포다.
숨은 절집이라 이름까지도 '숨을 장(藏)'을 쓴 장의사가 사실은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적의 침임을 막고, 백성의 안녕을 기원한 도량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이 작은 절집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 조선수군의 사기를 높인 적진포해전
1592년 5월 4일 여수에서 출항한 이순신 장군은 당포(唐浦·현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옥포와 합포에서 모두 31척의 왜군을 격파했다. 8일 남포(藍浦·현 창원시 귀산면 남포리) 앞바다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중 첩보가 날아들었다. 고리량(古里梁·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즉시 출동해 섬과 섬 사이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고리량에서는 왜선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 왜선이 고리량에 있었다면 시간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선은 돼지섬(저도·猪島)를 지나 고성까지 수색범위를 넓혔다.
적진포(赤珍浦·현 거류면 화당리)에 닿았다. 마을 안쪽까지 쑥 들어간 바다는 물결도 호수마냥 잔잔한 포구였다. 왜적들은 적진포에 크고 작은 13척의 전선을 정박해두고 뭍에 내려 재물을 빼앗고, 노략질이 한창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아군 전선은 서서히 적진포 안으로 진군했다. 왜적들은 아군을 발견하자마자 겁을 집어먹고는 산으로 도망쳤다. 이순신 장군은 낙안군수 신호(申浩),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등에게 명령을 내렸다. 군사들은 포구로 돌진해 11척을 깨부쉈다. 깜짝 놀란 왜적들은 산으로 육지로 도망치기 바빴다.
다시 적진포해전으로 돌아가, 새벽 한 차례의 해전을 승리로 끝낸 후 수군들은 늦은 조반을 들었다. 그때 한 조선인 포로가 어린 아이 하나를 등에 업은 채 울면서 산에서 내려왔다. 이신동(李信同)이라는 자였다.
이순신 장군이 그에게 무슨 일을 겪었느냐 물었다. 이신동은 여전히 겁에 질려 울면서 왜적들이 전날 적진포에 몰려와 민가에서 닥치는대로 재물을 빼앗아 소와 말을 동원해 적선에 옮겨 실었다고 했다. 초저녁부터는 소를 잡아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피리를 불었는데 모두 조선의 노래였다. 날이 밝아오자 왜구 중 반은 남아서 배를 지키고, 나머지 반은 뭍에 올라 고성 쪽으로 향했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신동이 다시 포로로 끌려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배에 오르라 했다. 그러나 이신동은 노모와 처자를 찾아야 하니 따를 수 없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훔치며 뭍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수군들은 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분노가 치밀었다. 장졸들은 지금 당장 부산과 가덕, 천성의 왜적들을 치러 가자 외치는데 그 기세는 장군이 말려야 할 정도로 열기가 솟았다.
임진왜란 발발 후 수군이 출동해 승리한 옥포·합포와 적진포해전을 묶어 옥포대첩이라 한다. 옥포대첩은 섬멸한 규모도 40척 이상으로 대승이었던 데다 이신동의 증언은 군사들의 사기를 더욱 끌어올리면서 이후 작전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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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의사에 모셔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1호 석조관음반가상 |
ⓒ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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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류산성과 마애약사불, 치유의 절집
임진왜란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소가야시대 역사의 흔적도 장의사 주변에는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다.
산 정상 부근에는 600m 정도의 거류산성이 남아있다. 거류산의 서쪽 경사면이 성의 안쪽이 되는 곡선의 성벽은 자연절벽 사이에 산돌을 쌓아 만들었다.
장의사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거류산성은 소가야시대 거류산의 자연지세를 이용해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했다. 남쪽에 출입구가 있었고, 성 안에는 우물도 있었다. 원래의 목적은 신라의 침략을 막는 것이었다지만 바다를 접한 지역의 특성을 보면 왜구를 막는 용도로도 쓰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거류산성은 신라가 가야를 합병하면서 폐성됐다. 지금의 모습은 후에 복원한 것이다.
거류산성 주변에서 지난해, 또 하나의 보물이 발견됐다. 고려 초기 것으로 보이는 마애약사여래좌상이 거류산 정상 부근 대나무숲 사이에서 천년의 침묵을 깨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장의사 외에는 근처에 절터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으니 마애약사불은 장의사와 연이 닿아있을 것이다.
질병에 고통받는 중생을 치유하고 두려움을 없애며 위안을 주는 마애약사불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거류산 절집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치유하는 곳이었던 게 틀림없다.
절집은 세속의 욕심을 다 벗고 들어서는 곳이다. 어떤 종교건 세상에 이바지하는 쓰임새를 가짐이 마땅하다. 청산만물은 자연의 질서로 유지되고, 종교는 평안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게 보자면 당동만 한반도를 굽어보며 원효대사가 기도했고, 이순신 장군이 왜구를 격침한 거류산 장의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호국불교의 도량이다.
“본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