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읍-동외리-동외
고성읍-동외리-동외
관리자 기자 / 입력 : 2005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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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읍-동외리-동외 ...
 동외리(東外里) 본래 고성군 동읍면의 지역으로서, 고성읍성(固城邑城) 동문(東門) 밖이 되므로 동문밖 또는 동문외, 줄여서 동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남하동, 정동을 병합하여 동외리라 해서 철성면(고성면)에 편입되었다. 1974년 남산마을이 남산 1동과 2동으로 분동(分洞)되면서 동외라는 동외마을, 남산 1마을, 남산 2마을, 정동마을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외(東外)
동명의 유래(由來) 소가야성(小伽耶城)의 네 개의 문 중 동쪽 문(東門) 밖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동문밖'을 줄여 '동밖' 또는 '동문외'를 줄여 '동외'라 불리어 왔던 마을이다.
마을의 형성(形成) 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마을에 남아있는 당산(堂山)의 패총(조개무덤)으로 미루어 이 지역이 선사시대 주거지의 일부였던 것은 분명하며, 조선조(朝鮮朝) 중엽(中葉)의 지도에서도 확인되듯이 성문의 바깥에 자리했던 마을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서민층이 모여 이곳에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 조상대대로 이곳에서 살았던 가문(家門)이 없는 것도, 이곳이 비교적 주거민의 이동이 빈번했었던 지역임을 말해 준다.
마을의 지세(地勢) 작은 언덕에 해당하는 당산(堂山)을 동남쪽에 두고 고성읍 성내리, 송학리, 율대리, 동외리 정동마을에 경계가 맞닿는 평지지역(平地地域)이다.
지명 일화(地名 逸話)
◇동외리 패총(貝塚) 동외마을 당산(堂山)에 있는 패총(조개무덤)은 고성만(固城灣)의 해안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총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소가야국의 중심지인 고성평야의 남서(南西) 구릉지로 이 야산을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당산이라 부른다. 1974년 동아대학교에서 패총 일부분을 발굴 조사한 바 있으며 김해식토기, 철기, 골각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고 야철지로 추정되는 지하유구(地下遺構)가 발견되어 창원 성산패총과 동일성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이 패총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도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산(堂山) 정상부근에 패총이 있는 동외마을의 작은 야산으로 이곳에서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6.25 당시까지만 해도 밤중에 촛불을 밝혀 놓고 기도를 올리는 광경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산새미 당산의 서쪽편에 있는 우물로, 수도(水道)가 보급되기 전에는 이 마을 사람들 뿐아니라 이웃 주민들도 많이 이용할 정도로 물이 마르는 날이 없이 물맛 또한 좋아 마을의 젖줄로 불리었다.
◇병막(病幕) 1946년 호열자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할 때 환자를 격리수용하던 임시막사가 현 대웅예식장앞 고성체육관 자리에 있었다. 희망촌이라고도 불렀다.
◇정삼이 둠벙 현 무지개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웅덩이 이름이다. 어떠한 한발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곳 주위의 농사는 매년 풍년이었다고 하는데 아파트 건립시 매립하여 지금은 그 자취조차 없어졌다.
◇철성정(鐵城亭) 당산의 남쪽 기슭에 있던 궁도장으로 원근 각처의 여러 한량들이 이곳에서 활을 쏘곤 하였는데 지금은 민가로 바뀌었고, 궁도장은 수남리 고성여자고등학교 앞의 매립지로 옮겼다.
◇명원재(明原齋) 고성군내 황씨 종친들의 재실이다. 이 재실의 재목(材木)은 옛 고성객사(固城客舍)로 건립되었다가 한때 통영군으로 갔다가 다시 고성체육관으로 지어진 집을 뜯어 그 재목의 일부를 황씨들이 구입하여 지었다고 한다.
◇기타(其他) 목화가 재배되던 시절, 고성의 유일한 솜공장이 동외마을에 있었다. 소구루마(달구지) 제작공장과 농기구, 놋그릇을 만들던 가내공장이 몇 군데 있었는데 달구지 제작소는 유명하였다고 한다. |
관리자 기자 /  입력 : 2005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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