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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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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곗바늘이 지나는 건 1분만 가만히 봐도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자리를 30년간 지키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경상남도아동위원협의회 최 | | 금용 부회장은 지난 7일 창원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경상남도아동위원협의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장장 30년간 묵묵히 회원으로, 고성군지회장으로, 경남도부회장으로 자리를 지킨 공로로 재임기념패를 받았다.“부모들은 아이를 태중에 열 달간 품고 길러 세상의 빛을 만나게 합니다. 그 아이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뭘 해야 할까 고민했지요. 아동위원으로, 고성의 아이들을 지키고 건강하고 밝게 기르고 싶었는데 그게 벌써 30년이라니 감개무량합니다.”아동복지는 경제적인 지원만 이르는 것이 아니다. 최금용 부회장의 말처럼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정서적, 인격적으로도 숱한 지원이 따라야 한다.
그 바탕에는 당연히 사랑과 봉사가 필요하다. 미래를 위한 가장 좋은 투자이자 가장 좋은 보험이 아이들을 잘 키워내는 것 아닌가.“언론을 통해 아동학대도 수시로 보도되고, 배를 곯고 아파도 제때 치료받지 못해 생명을 잃는 아이들이 아직 많습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보살피느냐에 우리 미래가 달려있어요. 모든 걸 다 떠나서 어른이니까 아이들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최금용 회장은 30년 넘는 세월동안 이장수당을 아껴 매년 100만 원씩 장학금을 내놓기도 한다. 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거나 꿈을 포기하는 아이들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지금껏 지원한 장학금만 2억 원 정도 된다. 남들을 위해 내놓는 돈을 모았으면 고성읍내에서는 꽤나 유지 축에 들었을 것이다.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가난한 집 아들이었으니 18살부터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면 동생들 뒷바라지하기 바빴다. 이발관에서 일하던 소년은 이발관 경영이 꿈이 됐다. 이발관 사장이 되고부터는 술, 담배는 절대 하지 않았다. 성공하면 이웃들과 나눠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70년대 말, 구만면 어느 학생이 돈이 없어 중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 담배를 하지 않은 돈을 모아 학비와 책값으로 전했다. 고성읍 어느 형제의 딱한 사정에 또 학비를 내놨다.최금용 부회장은 아동위원회 외에도 몇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1972년부터 지금까지 남내마을 이장을 맡아 마을 대소사를 직접 챙긴다. 그는 이장직을 늘 ‘주민의 머슴 역할’이라면서 군청과 읍사무소, 마을 곳곳을 누빈다. 군청 마당에서도 그의 마을방송 소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을 수 있다.열정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군민체육대회 축구 경기가 펼쳐질 때면 중계 아나운서가 된다. 경기장이 떠나가라 중계하는 그를 보면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싶다.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파월 장병들에게는 고향땅에서 보내온 편지 한 통이 무엇보다 큰 위로였다. 최금용 부회장은 위문편지를 자그마치 6천 통을 써보냈다. 그 덕분에 1969년에는 지금의 우정사업본부인 체신부의 편지왕 상을 받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방범대이기도 했고 국가 부도라 불리던 IMF 한파가 몰아친 1998년에는 고성군민상 부상으로 받았던 순금 10돈을 금모으기 운동에 내놓기도 했다. 북한 소학교를 돕기 위한 성금과 터키 지진 복구지원금, 올림픽 금메달 선부 축전 보내기에도 앞장섰다. 문화예술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고성오광대의 전수교육조교로, 마당쇠로 활약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인도네시아 지진 구호를 위한 성금을 쾌척했다. 이장수당을 모아 여기저기 나누기 바쁘고, 고성군내 봉사활동 현장이라면 열 일 제치고 달려간다.“제가 새옷을 한 벌 사입고 좋은 차를 사면 저는 돋보이고 편안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웃과 나누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집니다. 개인의 영달이나 부귀보다 아이들과 이웃이 다함께 잘 사는 길이 있다면 저는 언제든 그 길을 택할 겁니다.”키가 크고 덩치가 커야만 거인이 아니다. 최금용 부회장,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거인이고 세상 가장 부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