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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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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현면 봉발리 바루절 골짜기. 찢어지게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도 미처 졸업하지 못했다. 그러나 소년은 후에 대한민국 시조문학계를 대표하는 거목으로 우뚝 섰다.시조시인 서벌(1939~2005) 선생의 시조비가 지난 1일 백세공원 연꽃광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성군내 문인들의 뜻을 모아 진행된 이날 제막식에서는 장재 시조시인이 서벌 선생의 약력을 소개했다. 또한 백순금 시조시인이 ‘입동일기’, 서일옥 경남문학관장이 ‘가슴에 고성 넣고 사는 노래’를 낭송했다.제민숙 고성문인협회장은 선생과의 생전 인연과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고성의 문학인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이자 자긍심”이었다고 회상했다. 제 회장은 “이번 서벌 선생님 시비는 고성 문학인들의 뜻을 모아 만들어진 만큼 더 큰 의미를 갖는다”면서 “앞으로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더 많은 사람이 문학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도충홍 고성문화원장은 “백세공원도 좋지만 이 근방이 서벌 시인이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니 이 공원 이름을 서벌공원, 길 이름을 서벌로 등으로 바꾸는 것도 좋겠다”고 말해 참석한 문인들의 박수와 호응을 받았다.서벌 선생의 제자인 이우걸 시인은 “선생님은 직설적이고 다혈질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성격 덕분에 전화로 1시간이 넘게 혼자 이야기하기도 하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서벌 선생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시조인이자 평론가로,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 중 서벌표 시인들이 많다”면서 “시인 서벌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분”이라고 말했다.이날 제막식에는 서벌 선생의 아들 서동준 씨가 참석해 감사인사를 전했다.서동준 씨는 “저는 문학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평생 문학을 위해 모든 열정을 바친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면서 “아버지의 고향에서 후배문인들이 이렇게 의미있는 시비를 세워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돕겠다”고 말했다.
시조비는 시인이 살던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시조비는 펼친 원고지에 시인의 대표작인 ‘입동’, ‘산수유꽃’, ‘아침구름’ 등의 작품을 육필 그대로 담았다.본명은 봉섭, 호는 평중인 서벌 시인은 1939년 영현면 봉발리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5년 현 고성군보건소 입구인 남포 외가로 이사한 후 청년기를 보냈다.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서벌 선생은 설상가상 아버지의 와병으로 가장이 되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선생은 이 시기, 이호우의 시를 읽으며 문학에 발을 들였고 17세에 ‘영번지’ 동인활동을 시작했다.서벌 선생은 갈매기, 이향문학회, 향토문학, 기수문학은 물론 시조동인지 ‘율’을 창간하며 고유의 시세계를 다지는 한편 문인들간 소통의 장을 만들었다.선생은 언변이 좋고 감수성이 풍부하면서 동시에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서벌 선생은 격렬하게 투쟁하면서 쫓기는 몸이 되기도 했다.서벌 선생은 후배 양성에도 뜻을 품어 현재 활동 중인 걸출한 시조시인들을 등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생은 시조의 대중화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평론, 시조론 등 기초를 마련하고 동시조 보급에도 앞장섰다.1961년 첫시조집 ‘하늘색 일요일’을 시작으로 ‘각목집’, 육필 사설시조집 ‘서벌사설’, ‘휘파람새 나무에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과 4인 사화집 ‘최재복, 허유, 이정림, 서벌’ 등을 출간하며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다. 또한 정운시조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중앙일보 시조대상(본상), 남명문학상(본상), 가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시조문학의 부흥을 이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