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었다. 17년 전 회사에서 단체로 5㎞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그저 회사사람들과 하루 나들이 삼아 출전한 참이었다. 40분 남짓 달리면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터질 듯이 뭉쳤다. 하지만 완주지점에 발을 딛는 순간 생전 처음 느껴보는 희열에 짜릿했다. “완주점에 골인하는 순간의 기분은 직접 뛰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결코 느낄 수 없어요. 제가 아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도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에요. 그게 중독이더라고요.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 달리다 보니 꿈도 이뤄지네요.” 김권순 씨는 아마추어 마라토너들 사이에서 유명인사다. 지난 1일 합천군민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7회 합천벚꽃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를 자그마치 100회나 완주했다. 2002년 10월 조선일보 춘천마라톤대회에 풀코스로 참가한 후 16년만이다. 공식적으로만 4천219.5㎞를 달렸다. 대회에서만 고성군청에서 서울시청까지 12번쯤 왕복한 셈이다. 김씨는 마라톤 풀코스 42.195㎞를 세 시간 안에 완주하는 서브3도 진작에 달성했다. 2005년 그가 달성한 서브3은 모든 마스터즈 마라토너들의 꿈이다. 그는 고성군 최초 서브3 기록 보유자다. 신나게 달리던 시절이었다. 풀을 베던 중 예초기가 왼쪽 발목을 지나갔다. 발목이 거의 절단되다시피 했다. 절망이었다. 신경이 잘렸으니 걷기도 힘들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를 받아들었다. “한창 마라톤에 재미를 붙여 걷기보다 달리는 일이 더 많았던 시기에 당한 사고였어요. 눈 깜빡할 사이에 닥친 사고로 걷는 것조차 불투명했습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 했어요. 그러니 지금 이렇게 달리는 것 자체가 제게는 행복이죠.” 오로지 두 다리와 불굴의 의지만으로 기록을 만들어내는 것이 마라톤이다. 달리는 동안에는 누군가 도와줄 수도 없다. 스스로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목표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는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신력이 먼저다. “그렇게 버티는 시간도 오롯이 저만의 시간입니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편히 할 수 없이 한 발 한 발 내딛어야 합니다.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가장 즐거운 시간이지요. 마라톤은 어떤 편법도 통하지 않는 정직한 스포츠입니다. 저에게 마라톤은 스포츠가 아니라 철학이고 참선입니다.” 진주까지 출퇴근해야 하는 일상이라 언제나 시간에 쫓기지만 짧게라도 시간을 만들어 달린다. 요즘처럼 꽃피는 계절이면 꽃비를 맞으며, 여름에는 푸르름을 한껏 느끼며, 가을에는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길을, 겨울에는 소복한 눈길을 달린다. 바쁜 일상과 가장이라는 묵직한 짐을 달리는 동안만큼은 내려둔다.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목표만 있을 뿐이다. 그 덕분에 이번 100회 완주뿐 아니라 지난 동계올림픽 성화봉송에서 통영지역 주자로도 뛰었다. 이전 주자로부터 불꽃을 건네받고 다음 주자에게 불꽃을 건네주며 울컥했다. “늘 달릴 때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숫자이자 제 삶을 다시 일으켜세운 감동의 숫자가 바로 42.195입니다. 세 시간 남짓 달리는 동안만큼은 모든 걸 잊고 달리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제 인생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은 마라톤이지만 이건 저 혼자가 아니라 고성마라톤클럽 회원들과 함께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에요. 앞으로도 함께 달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