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주)고성신문사 |
|
식민사관의 핵심논리가 됐던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과 동시에 임나는 가야가 아닌 대마도였다는 사실을 실증한 조사결과가 공개됐다.인하대 융합고고학과 남창희 교수 연구팀은 지난 29일 창원대학교 봉림관에서 개최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의 진실’ 조사발표회에서 이 같이 밝혔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인용,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한 365년부터 200년간 식민통치기관인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다는 점을 들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합리화해왔다.
남창희 교수팀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된 일본서기의 중애천황조 기록을 세세하게 분석한 결과 논리적 모순을 다수 발견했다고 밝혔다.일본서기에는 신공황후가 신라 정벌 당시 바닷물이 육지로 밀려들어와 겁을 먹은 신라왕이 항복했다고 돼있으나 신라가 접한 동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별로 없는 지역이다. 또한 경주 시내 형산강 둔치의 해발고도가 28m, 시내 평지의 표고가 30~40m이기 때문에 밀물이 시내까지 들어올 수 없다.또 부산과 김해를 포함한 남해안 지역은 가야 지역으로 신라와는 다른 연맹국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신공황후 신라정벌설에 해당되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연구팀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일본 대마도에 각각 세력권을 나눠갖고 있었다는 부산대 이병선 교수의 주장에 주목했다.실제로 대마도 아소만의 와타즈미신사의 수중 도리이는 만조 시 최대 2m가 물에 잠기는 것으로 유명할 정도로 뚜렷한 조수간만현상을 보인다. 한국천문연구원 양홍진 박사가 조수간만 프로그램으로 반복적으로 데이터를 입력해 계산한 결과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기해월 신축일부터 3일간 만조였고, 후쿠오카에서 배로 사흘이 걸린 대마도 서쪽에는 사리현상이 있었다고 밝혔다.답사팀이 대마도에서 조사를 펼친 결과 대마도 서북 좌호만 지역이 작은 성읍국가로서 최적의 조건이며, 북쪽에서 신라계통의 토기가 다수 발견됐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 기록에 따르면 임나가 후쿠오카에서 2천 리 가량 떨어진 지역이고, 신라 경주의 서남방향이며 북쪽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다고 기록돼있다. 이 기록을 정밀분석했던 고려대 최재석 명예교수와 북한의 김석형 등은 대마도를 임나라고 비정하기도 했다.이를 바탕으로 볼 때 신공황후가 정벌한 것은 신라가 아니라 대마도 서북쪽의 신라계 성읍국가였고, 대마도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다.남창희 교수는 “군사고고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신공황후의 원정군은 용이한 상륙작전을 위해 만조 수위가 가종 높을 때 만의 입구에서 군사력 시위 등 심리전을 펼쳤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365년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놓고 보면 신라는 대마도의 신라계 세력을 공격하는 백제 동맹국 홰의 공세에 대응이 어려웠다”면서 “가야와 동맹한 백제의 해군력이 우월했으며 백제가 현재의 김해나 부산지역에 신라의 지원수군을 묶어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이에 앞서 2000년에 발굴조사된 송학동고분군 제1호분이 발굴조사 전 일본 고분시대의 전방후원분과 유사하여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조사결과 3기의 원형 봉토분이 연접하여 축조된 것으로 밝혀져 임나일본부설을 일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