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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일 구만면 연동 함안이씨공원묘원에서 연계 이양수 선생 행적비 제막식이 있었다.연계 선생의 아들인 이상을 씨는 10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고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 칠순이 넘은 나이에 이르러 개인적으로 집안이나 이웃을 둘러보고 보답할 수 있게 됐단다.
시대가 바뀌고 인심이 야박해진 요즘에 돌아간 아버지로부터 별다른 은혜를 받지 못한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내어 비석을 세우고 그 내력을 이웃과 사회에 알려 효행 풍속을 선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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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일 구만면 연동 함안이씨공원묘원에서 연계 이양수 선생 행적비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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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제막식은 고성향교와 이회서당 유림들이 고유제의 행사에 곁들여 시행됐다.초헌관은 허창무 이회서당 고문, 아헌관은 구판옥 숭충사제전위원장, 종헌관은 이영도 함안이씨종중회장, 집례 심상정, 축관 김성균, 집사 박정식·정호용·구갑종, 학생 정창석 고성향교 전교가 맡았다.연계 이양수 공은 1908년에 태어나 일제탄압과 6.25의 혼란기를 살았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총명하여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집안이나 이웃의 선망을 받았다. 열대여섯 나이에 냉천서실 의재 선생에게 대학 논어 등을 배워 선비로서의 기풍을 갖췄다. 약관의 나이에 부친상을 당해서는 전통의례에 따라 3년상을 마쳤다. 상례를 끝낸 후 백형의 간곡한 권고로 당시 석학이었던 정산 채산 두 선생께 사사하였다.
손에서 책을 놓는 일이 없이 배운 것을 열심히 갈고 닦아 학문은 깊어지고 덕성은 높아져 집안이나 동문수학한 학우들의 기대가 높았다.국운이 쇠망한 일제치하에 항거하는 울분을 정헌 곽종천 선생과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40이 넘어서는 할아버지 때 지어진 연파정에서 서당을 열어 원근에서 몰려든 학생들을 각자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교학하여 문하에 뛰어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선생은 학문이 심오하고 언행이 신중하여 이웃과 사우의 선망이 됐으며 영매한 인품이 비록 초야에 묻혔으나 지조는 송백처럼 굳세어 선비사회의 표상이 됐다.그러나 아쉽게도 하늘이 선생의 수명을 많이 주지 않아 50에 하세하니 집안이나 이웃의 아쉬움이 더욱 큰 삶이었다.
선생이 타계한 이듬해 <연계선생문집>이 간행되었으며 선생과 함께 종유한 선비들이 경연계를 조직하여 선생의 가르침을 이었다.식후에는 유족이 마련한 오찬으로 200여 내빈이 푸짐한 잔치상과 구만을 중심으로한 옛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근래에 보기 힘든 시간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