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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독립의 열망, 100년을 지나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다

100년을 거슬러, 기억해야 할 역사를 마주하다
고성의 만세운동과 항일운동의 역사
국채보상운동에 고성 2천500명 동참
노동·여성·청년운동 다양한 계층 활동동
재조명 활발, 공훈록 등 기록 정정 필요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9월 11일
글 싣는 순서
① 고성독립운동, 잊혀진 현장을 찾다
② 고성청년들, 일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③ 나는 그리고 우리는 자랑스러운 조선인이오
④ 꺼지지 않는 조선독립의 불꽃 서울에서 피다
⑤ 조선 독립의 열망,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다
ⓒ (주)고성신문사

1910년 8월 29일,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늘 위태위태하던 대한제국이 결국 통치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했다. 한반도에 고조선이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국권을 다른 나라에 빼앗기는 치욕과 수모를 당한 것이다. 자그마치 36년의 세월동안 나라 잃은 설움을 겪었다. 
청년들은 일제에게는 끊임없이 공급되는 노동력이었고, 소녀들은 끝도 없이 일제에게 짓밟혀야 했다. 일제에 자칫 거슬리면 붙들려 고문을 당했고, 한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것은 눈 깜빡할 사이였다. 말도 안 되는 인체실험의 대상이었고, 전쟁물자 공급원이었다. 조선의 청춘들은 청춘이 아니었고,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었다.

# 분연히 일어난 그날의 함성
교과서에 있는 단 몇 문장으로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를 다 알 수 없다. 또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들이 모두 다 밝혀지지도 않았다. 숨은 이야기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고성만 해도 그렇다. 1919년 3월 중순 이후 수 차례 이어진 만세운동도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3월 15일 밤, 박거수와 박진완으로부터 시작된 고성읍 만세시위는 이틀 후인 17일, 대가저수지 둑방길에서 고성읍으로 향하는 대가가도를 지나기로 돼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돼버리고 주동자인 배만두 선생은 구류됐다. 실패로 돌아갔다.1919년 3월 20일 오후 1시, 구만면에 울린 나팔소리를 신호탄으로 만세운동 시위대열은 십릿길을 걸어 배둔장으로 향했다. 중간에 일본경찰과 충돌은 있었지만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같은 달 22일에는 고성읍에서 또 한 번의 만세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이 선두에 섰던 이 만세대열에는 곧 장꾼들도 합류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고성사람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이후에도 고성에서의 만세운동은 유림은 물론 종교인들과 노동자, 학생들 사이에서 연이어 일어났다.

# 대한제국의 존립이 백성의 손에 달렸다
만세운동만이 독립운동은 아니다. 갖은 술수로 한반도의 36년을 앗아간 일제에 맞선 모든 것이 독립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도 그랬다.1900년대 초반 일본은 대한제국의 경제를 쥐고 흔들려 했다.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을 도입하라고 압박했다. 50만 원에서 시작된 빚은 1천300만 원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갚을 길이 없었다. 주권을 일본에 내주기 직전 나선 것은 민초들이었다. 국채를 갚아 주권을, 통치권을 되찾아야 했다. 싸전 상인들도, 기생들도, 시골 촌로들도 살림을 팔아서라도 얼마간을 내놨다. 전 국민이 3개월간 담배를 끊고 의연금을 모으면 국채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항일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다.
전국에서 27만 명, 경남 서부에서만 2만4천 명이 동참했다. 고성에서도 2천500명이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해 의연금을 모았다. 그러나 기록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군민들에게 100년 전 이 작은 고장에도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는 것을 먼저 알려줄 필요가 있다. 고성의 미래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고성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가치를 새겨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 조선인이 대우받는 세상을 위하여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조선인들의 삶은 급속도로 팍팍해졌다. 1918년 동해면 내산리에는 일본인 아홉 가구가 있었다. 이 약망어업자들은 멸치잡이를 독점하고 수많은 어부들을 부렸다. 그 중 50명은 일본인 기술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조선어부들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주며 우대했다. 조선어부들은 값싼 노동력이었다.견디다 못해 조선인 어부들이 파업을 계획했다. 조선인 어부 500명이 한데 모여 시위를 도모했다. 그러나 일본헌병은 칼을 빼들었다. 조선인 어부들에게는 돌멩이가 무기였다. 조선어부들의 항거가 이어지자 고성헌병분견소와 통영경찰서 지원병력까지 동원돼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 들어서는 고성에도 노동조합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지식층으로 일컬어지던 청년층이 주축이 돼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요구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 옹호, 생활보장은 물론 노동자들의 의식을 계몽하고 단결해 일제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했다.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들도 공부해야 했다. 고성읍은 물론 마암면 천도교회에 야학이 들어섰다.이 외에도 고성에서는 여성운동, 신간회, 청년운동이 연달아 일어나며 항일정신은 점차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바로 잡아야 할 역사의 기록
남원 가서 소리 자랑하지 말고 고성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고성은 명실공히 인물의 고장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인물 재조명 사업이 한창이다. 고성의 역사성과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알리고, 잘못 아는 사람에게는 바로잡아주기 위해서다.
올해 들어서는 이달의 인물을 선정해 홍보하고, 선양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2월부터 시작된 이 사업의 첫 인물로 백초월 스님이 선정되면서 올해 3.1절부터 고성에 진관사태극기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지금까지 태극기를 게양하는 시기면 늘 규격태극기와 진관사태극기가 나란히 걸린다. 초월스님의 이름을 딴 명예도로도 스님의 생가 근처에 생겼다. 고성 이달의 인물 중 가장 많은 분야가 독립운동가다. 6월에는 배만두 선생, 7월 허재기 선생에 이어 8월에는 최낙종 선생이 선정됐다. 최낙종 선생이 선두에 섰던 배둔장터 만세운동은 벌써 20여 년 전부터 매년 재현행사도 하고 있다. 고무적인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점은 남아있다. 고성의 인물로 선정되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고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공훈록에서조차 다른 지역 출신이라고 기록돼있다. 아니, 이제는 아주 잘 알려진 백초월 스님마저도 본적은 고성이라 돼있으나 공훈록 내용에는 진주 출신으로 돼있다.
신민회 계열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이끌었던 김관제 선생은 출신지는 고성으로 돼있지만 대구 사람으로 기록돼있다.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분명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경제적 가치가 가장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처칠의 말처럼, 100년의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들을 잊고서는 이 땅의 발전을 논할 수 없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精神(혼) 그리고 正信(믿음). 둘 중 어느 것이든 우리는 그 ‘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고성군 역사 정립의 첫걸음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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