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소가야로 지칭한 기록도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소가야’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소가야가 존재하던 시기보다 한참지난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5가야조에 ‘소가야는 지금(고려 초)의고성(固城)’이라는 대목이 처음이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법치국가가 아니었고,연맹 형태의 소국들이었기 때문에하나의 국가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않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그럼우리가 알고 있는 소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익히 알려진대로 편의상소가야로 칭한다.)
# 소가야, 500년 역사의 시작
‘가야’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가 붙인 이름일 뿐 실제 가야의 이름과는무관하거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보고 있다.또한 실제 가야는 여섯 개의 국가가 아니라 10개, 많게는 13개 나라의연맹 혹은 집합체였다.
소가야는 구지봉에서 태어난 6명의 동자 중 막내 김말로가 신라 유리왕 19년인 42년, 고성을 중심으로 건국한 나라다. 바다와 접해있으면서도 평야를 가졌으며, 고성만을 낀 기름진 농토는 농경사회 이전부터 정착생활에 유리했다.
때문에 고성을중심으로 사천, 통영에까지 소가야의 세력이 미쳤던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김말로 왕 이후소가야의 왕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송학동고분군, 내산리고분군 등 유적 및 유물 등으로 미루어짐작해야 하니 연구가 시급한 상황이다.
# 진주와 사천을 포함했던 소가야의 영토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성의 영현(領縣)은 셋이었다. 지금의 고성군지역인 고성현과 현 사천시 사천면에 해당하는 사물현(史勿縣), 현 진주시의 동쪽까지 포함한 일선현(一善縣)이 소가야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마암면과 동해면, 하이면, 상리면,대가면 등 군내 지역들은 물론 인근사천시에서까지 발견되는 고인돌군등을 통해 확인되는 것처럼 고성군을중심으로 인근 지역에는 청동기 이후소규모 국가들이 계속해 존재해왔다.
당시만 해도 국가의 형태가 아닌, 집단의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서기 전 2세기까지 독립세력을 유지하던 소규모 국가들은 초기 철기문화의 발달과 함께 정치세력이 나타나면서 단일정치집단으로 통합됐다. 그것이 바로 고자미동국이었다. 고성읍 동외리, 송학리, 수남리 등에 분포한 초기철기시대의 패총들중 특히 동외동패총에서는 2세기 전반 청동기와 철기유물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볼 때 정치지배자의 존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는 고자미동국의 도읍지가고성읍 일대였던 것으로 보는 근거가 된다.42년부터 461년간 고성은 소가야의 도읍지였다.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멸망한후 737년, 신라 효성왕 1년에 고자군으로 개칭됐다가 경덕왕 16년에 주군현을 중국식으로 개정하면서 고자군은 고성군이 됐다.995년 고려 성종 14년에 고주자사(固州刺史)를 뒀다는 점은 고성이 곧고주였다는 사실의 근거이며 이후철성(鐵城)으로 불렀다. 그러다 고려현종 9년인 1018년에 고성현으로 개칭됐다.
# 소가야의 멸망과 소가야인의 묘연한 행방
서기 9년, 백제는 마한을 강제합병한다. 이 과정에서 진국이 멸망한 후구야국을 중심으로 독립한 가야연맹중에 고사포국이 포함돼있다. 그러나 고성군의 내륙지역은 고사포국의지역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고사포국을 포함한 포상8국은 바다와 접해있는 지리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해상무역에서 구야국에게 주도권을 뺏긴 상태였다. 현재 경남 김해지역에 해당하는 구야국은 김해만천연항구를 기반으로 남해안 무역의중심지였다. 포상8국은 가야 이외의중국이나 일본 등과 교역할 때 구야국에 의존해야 했다.무역 주도권이 없으니 국력이 약했던 포상8국은 골포를 중심으로 결속해 구야국에 대항한다. 그리고 가야연맹에서 이탈했고 209년, 구야국과안라국을 공격하며 가야연맹과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가야가 신라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격하는 바람에 1차전쟁은 패배로 끝났다.
이후 고성을 중심으로 한 고사포국과 칠포, 골포는 215년 갈화(竭火·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굴화리)를 침공했지만 신라군의 철저한방어에 또 한 번 물러나야 했다. 이패전으로 인해 포상8국은 다시 가야연맹에 부속됐다.
400년 구야국이 고구려에 패망하면서 전기가야연맹은 소멸됐다. 이와중에 고사포국 역시 뚜렷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로 대가야에 편입됐지만 대가야가 백제, 신라와의항쟁에서 패배하고 남북으로 분열되면서 안라국 중심의 남가야에 소속됐다.이러한 부침은 끝나지 않았고 후에남가야가 신라에 투항하면서 고사포국 역시 신라에 주도권을 뺏기고 만다. 멸망한 고사포국의 후손들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지만확인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