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주)고성신문사 |
|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사람들을 울리고,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것. 흔치는 않지만 분명 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감동이라면 오죽 좋을까.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안타깝게도 감동을 주는 사진이 아니다.사진 속 남자들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말라있다. 볼이 푹 꺼져 광대가 도드라지고, 뼈 위에 피부가 억지스러울 정도로 겨우 붙어있었다.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했다. 마치 살짝 스치면 바스라질 듯이.
# 청년 심재인은 강제징용자가 아니다
청년들의 사진에는 그 악명 높은 군함도의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그것도 시청률 15%는 나오는 무한도전을 통해 그렇게 전국에 알려졌다. 2015년 9월, 무한도전 445회 방송에서는 하시마섬을 찾아갔다. 하시마에서 지옥 같은 징용생활을 했던 분들을 만났다. 그 과정에서 소개된 사진 한 장. 방송에서 그리 나왔으니 온갖 기사들에도 그들은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이었다. 제대로 거르지 못한 네티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이상했다. 기자가 기억하기에 이 사진의 맨 왼쪽, 다른 이들보다 한 뼘쯤 큰 이의 이름은 ‘심재인’이었다. 흐릿한 흑백 배경도 군함도 그러니까 일본 나가사키현 앞바다에 유령섬처럼 떠있는 하시마섬(端島·단도) 탄광이 아니다. 그리고 심재인은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국장 제91호를 추서받은 항일운동가였다.심재인 선생의 큰아들인 심진표 전 도의원에게 물었다. 아버님께서 일본에 간 건 유학 때문이지, 강제징용을 간 적은 없지 않냐고. 작은아들 심의표 전 KBS보도국장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는 강제징용이 아닌 유학이라고 못박았다.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가 강제징용간 조선인 노동자로 사진이 이렇게 떠도는 거냐고, 이 사진은 형무소에서 출소한 심재인 선생 아니냐고, 왜 바로잡지 않는 거냐고.유가족들은 언젠가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그때 심재인 선생의 동생이 그 비쩍 마른 청년을 보고는 형님이라 했다. 그리고 심 선생의 부인인 강분선 여사도 너희 아버지가 맞다며, 같이 산 세월이라곤 겨우 2년뿐이었지만 14년을 남편과 아내로 살았고 또한 반백년을 그리워하고 살았던 이를 모를 리 없다고 했다. 눈매와 턱선, 광대까지 전부 남편 심재인이 맞다고 확신했다.아들들은 확인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기록은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물어물어 찾아야만 했다. 아버지의 지문도, 재판기록들도 모두 확인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오래 전 돌아가신 분을 그저 편히 쉬게 해드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찾을수록 아버지에 대한 기록의 조각들이 차라리 몰랐을 때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후벼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하겠지만,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두고 세상은 오해를 했으니 더더욱 묻어두고 싶었을 것이다.
# 일제에 맞섰으나 기억되지 못하는 아나키스트, 최낙종
최낙종 선생의 손자인 최연도 씨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사내는 눈물을 보였다.기껏해야 너댓살 먹었을 시절에 현해탄을 건너 할아버지의 유해를 모셔오던 순간을 떠올리며 최씨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감격으로 기억해서가 아니다. 바다 건너에서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기개와 절개만은 꼿꼿하게 지켰을 할아버지가 떠올라서였고, 그에 반비례해 더욱 힘들어졌을 할아버지의 삶이 사무쳐서였고, 또한 이 땅의 독립을 결국은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 안타까워서였다.고성군 최초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3.1운동창의탑에서 배둔장터독립만세운동을 재연하면서도 정작 그 만세행렬을 이끈 최낙종 선생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은 눈총을 보냈다. 일본 순사들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으니 살기가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독립운동 하느라고 있던 재산도 다 썼는데 그 눈총을 견디다 못해 가족들은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기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는 50년을 타향에서 살아야만 했다.정말이지 혹독한 가난이었다. 최연도 씨는 대학시절 학비가 없었다. 항일운동가의 손자라는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살아야했다. 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에 맞선 대가가 그랬다. 대를 이어 가난이 계속됐다.영화 ‘박열’이 개봉을 앞둔 시점이었다. 최낙종 선생은 박열 선생과 함께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다. 도쿄에서 삼문사인쇄소를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은 죄 항일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재일본 한국인 노동자들을 규합해 노동운동을 했고, 일제를 비판하는 책과 신문을 만들어냈다. 최 선생의 사후, 박열 선생은 소중한 친우를 잃고 애도하며 글을 쓰기도 했다. 함께 싸운 박열 선생은 그리 잘 알려졌는데 도대체 왜 최낙종 선생은 잊혀진 걸까. 고성사람인 그를 왜 고성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까.
# 100년 전 그들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렇게 시작된 의문이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마치 시리즈처럼, 기자가 고집하고 매달렸던 기사 몇 편에 가서 닿았다. 대학교수들의 논문처럼 아주 상세하고 정제되고 전문적인 글은 아니라도, 최낙종, 백초월, 정세권 그리고 그들과 이어지기도 혹은 독자적으로 일제에 맞서 운과 명을 걸고 나선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기사를 쓴 이후에도 새로운 정보들이 보일 때마다 갈무리해뒀다. 다른 언론에서의 기록들과 100여 년 전의 판결문까지 글자 한 자 놓칠까 세 번, 네 번을 읽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그들의 이름을 한국과 일본의 검색창에 넣었고, 저녁 퇴근 전이면 아침에 즐겨찾기해둔 기록들을 읽고 또 읽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고장난 녹음기마냥 줄줄 욀 것처럼 머릿속에 구겨넣었다.
누가 돈을 주겠다며 시켜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 희미하게 생각했다. 일본에서 직접, 두 눈으로 그들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고성사람이면서도 나는 몰랐던 이 작은 고장의 항일운동가들을 찾고 싶었다.그게 일본행 계획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삶을 통째로 내던지고도 다르게 정확히는 틀리게 기억되는 것일까. 그들은 왜 바다 건너의 섬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것일까. 도대체 왜 그들은,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그 존재조차 희미해지는 것일까.우리는 그들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잊은 것이라면 기억해내면 된다. 그러나 깨달은 후에 닥쳐올 무게도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도대체 왜 그 모든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일까. 그들은 왜 목숨까지 내놓고 사지로 걸어들어갔을까.궁금했다. 동시대를 산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호흡하고 싶었다.정확치 않은 정보들을 손에 쥐고 도쿄와 나가사키를 헤매고 다녔다. 40년대 행정구역개편으로 이미 사라진 주소들을 현장에서 물어물어 찾아헤매야 했다. 한여름 섬나라의 후끈한 열기와 높은 습도 그리고 장마철임에도 며칠을 내리꽂히던 여름볕에 새까매졌다. 두피에서 흐른 땀 한 방울이 발끝으로 떨어질 때는 큰 덩어리가 돼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많이 걸어 발에는 물집이 여러 개 잡히고, 다리는 바지에 쓸려 진물이 날 정도였다.그만큼 그들을 마주하고 싶었다. 간절하게도.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게 그들이 그토록 되찾고 싶었던 이 땅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아프고 아파서 도저히 일본땅을 밟을 수 없었을 유가족들을 대신해 위로하고 싶었다. 거창하지만 진심이었다.100년을 거슬러 똑똑히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게, 짧지만 긴 여정이 시작됐다.
<‘100년을 거슬러, 기억해야 할 역사를 마주하다’는 다음호부터 연재됩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