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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란만 물가에 ‘잴피’가 없다. 물 깃을 따라 샅샅이 살펴도 보이질 않는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쑥, 억새 따위 풀이 나 있지 않는 산기슭을 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리들의 삶의 터전인 들이며 산이 온통 황무지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렇다. 지금 자란만은 풀 한 포기 없는 들과 다를 바 없다. 잴피며 몰이 죽어버린 바다는 황무지와 다를 바 없는 ‘황무해’일 텐데, 자란만 일대는 그야말로 ‘황무해’다.
육지의 사막에 견주어서 ‘해막’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해막이 다 된 자란만!,
‘황무해’로 변해 버린 자란만!
어쩌다가 이 지경, 이 꼴이 되었을까?
청정해역이라고 당당히 자랑한 그 때가 바로 어제같은데 , 오늘 자란만이 ‘부정 해역’으로 변해버렸다면 과장일까?
하일면 송천리에 터를 잡은 초기에는 즐겨서 자란만 물가에서 수영을 하곤 했다. 수온이 높은 덕에 늦봄부터 이른 가을까지 , 줄곧 수영을 즐기고 일광욕을 즐기곤 했다.
그러나 그만 둔 지가 이미 사오 년도 더 되었다. 어느 여름 멱을 감고 나오는데 온 몸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온 피부가 찌근덕거렸다. 그 때 이후로 자란만 물에 몸은커녕 발도 담근 적이 없다.
물가를 걷다 보면, 어디서나 굴 껍데기가 밟힌다. 얇은 고무신을 신은 발바닥이 아려 들기도 한다. 물속 바닥에도 부서진 굴 껍데기가 잔뜩 널브러질 대로 널브러져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고 덧 싸이고 곱 싸인 데도 적지 않다.
물빛은 푸르기를 그만 둔 지 이미 오래다. 노상 누르죽죽하다. 그 불쾌한 빛과 바닥에 깔린 굴 껍데기의 희끄무레한 빛이 뒤엉겨서는 보는 사람의 토악질을 불러일으킬 지경이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친 굴 껍데기와 그 밖의 조개껍데기가 부옇게 산화(酸化)해서 풀리고 있는 게 보인다.
사이사이로 거품이 부글대기도 한다. 바닷물이 썩고 있는 게, 부패하고 있는 게 알알이 보인다.
내팽개쳐진 ‘부이’, 그러니까, 굴 양식에 사용한 허이연 그 프라스틱 덩치도 단단히 한 몫 거들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물가의 산책도 사양하고 있다.
밤에 나가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순수한 갯내만이 나는 게 아니다. 구역질 날 것 같은 악취가 풍기기도 한다.
자란만 물가를 걷는데 악취에 시달리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다 보니, 그 많이 잡히던 문주리도 거의 낚이질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숭어 철이지만, 하루 온종일 버텨 보아야 네다섯 마리 낚아 올리면 그나마 요행이라고 한다.
왜? 어쩌다가 청정해역, 자란만을 이 지경으로 몰아붙였을까?
누가 뭘 어떻게 했기에 맑디맑았던 우리 자란만을 이 꼴, 이 모양으로 썩어 나가게 했을까?
이젠 정말 다들 회개해야 한다. 자란만 죽이고 고성만 죽이면, 고성이 다 죽는다. 이대로 못 본 척하는 것은 집단 자살을 차곡, 차곡 예비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행정 당국과 업자와 주민이 고성의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도 나서야 한다. 다 함께 결연히 나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