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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국가 대가야의 발자취를 찾아서

조계옥 고성향토사연구소 회원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07월 10일
ⓒ (주)고성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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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소장 이인성) 회원 30명은 지난 6월 27일 고령지역 대가야역사관 및 왕릉전시관을 견학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흠뻑 내린 고령의 들판은 온통 초록빛으로 눈부셨다.대가야역사관으로 가는 도중에 개실마을에 잠시 들렀다.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고 1457년(세조3)에 조의제문을 지어 유명한 점필제 김종직의 후손들이 350여 년간 동성마을로 이룬 그의 종택을 둘러봤다.종택 앞 둥근 바위면에 새긴 글 ‘부와 명예 그 어떤 것을 다 가져도 대접 받지 못하는 삶은 실패한 인생이다’가 새삼스럽다. 그의 유물과 유품의 일부는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여 발길을 돌렸다.대가야역사박물관으로 들어서는 길옆으로 머리 없는 불상을 비롯한 고령의 불교 문화재를 전시해 두어 감상했다. 박물관 뒤로 지산군 고분군 전경이 펼쳐져 있다. 산 위 능선을 따라 볼록볼록 솟은 고분이 수없이 보였다. 10여 능선에 분포하고 있는 대가야 고분은 국내 최대의 고분군으로 무려 700여 기라고 한다. 경주나 공주, 부여 등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태다.대가야역사관에는 대가야는 물론 고령지역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까지 유물을 전시해 두었다.대가야시대의 옷을 차려 입은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대가야역사에 관한 이야기에 푹 빠져 이동하다 청동기시대 바위그림 앞에 멈춰 섰다. 현제 고령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바위그림 유적이 남아 있다. 대가야 왕릉전시관을 세우기 위해 그 터를 발굴조사를 할 때 대가야시대 무덤에서 청동기시대 바위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바위 면에 여러 가지 그림을 새긴 바위그림은 윷판모양, 별자리 모양, 나이테 모양의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고 가면모양은 신의 모습을 의미한다. 풍년과 자손이 번성을 기원하는 청동기시대의 제사유적으로 추정되는 바위그림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하지만 대가야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면서 조상들이 숭배했던 바위그림이 새겨진 돌들을 떼어와 무덤 뚜껑으로 사용했다.박물관 주변 푸른 언덕에 흰 글씨로 ‘철의 왕국 대가야’라고 써있다. 대가야의 철 생산은 대가야 국력을 키우는데 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야로의 철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세금으로 바쳤을 만큼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만들어진 철은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였다.이어서 그들의 의식주를 눈여겨봤다. 대가야인들은 산기슭이나 골짜기 곳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지면보다 높게 한 다락 창고를 만들어 곡식이나 숯 등을 보관했다. 그들이 입은 옷은 저고리와 바지 또는 치마 그리고 겉옷으로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옷에 사용한 무늬나 깃 형태 등이 신라와 대가야의 옷차림은 달랐다고 한다.세종실록지리지에 고령 도자기 품질이 으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대가야의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전감이 특징이다. 넓고 깊은 몸체에 여러 겹의 물결무늬와 솔잎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고령에는 5곳의 대규모 가마터가 남아 있고 지금까지 확인된 가마터가 100여 곳이 넘는다. 대가야 토기에는 ‘대왕’ ‘하부사리리’ 등의 한자가 쓰여 있다. 대가야시대의 고분 속에는 복숭아 씨앗, 생선뼈, 닭뼈 등이 담긴 토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그 중에 고둥은 뚜껑 있는 굽다리 접시에 담겨 있다. 1천500년의 시간을 넘어 대가야 사람들의 밥상에 올랐던 음식물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대가야인들의 움집터에서는 흙구슬이 나왔는데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추측된다. 요즘과 같이 집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던 것 같다.한여름 뙤약볕에도 굴하지 않고 피는 배롱나무 꽃이 붉게 피어있는 산책로를 따라 왕릉전시관으로 올라갔다.대가야 왕릉전시관은 국내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 무덤 고분군 44호 내부를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 대가야 무덤의 특징은 오늘날 무덤을 만드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능선의 높은 쪽으로 올라가면서 무덤을 만들었으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크다. 이는 대가야 왕의 힘이 점점커지면서 더 높은 곳에 더 큰 무덤을 만들려했다는 것이다. 어둑한 왕릉 전시관을 보는 순간 음침한 느낌과 함께 마음이 저릿했다.주인과 순장자의 생생한 매장 모습, 껴묻거리 등이 내세에 대한 바람과 무고한 주검의 간극이 어려 있다. 고분의 입지와 규모, 구조,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가야지역 최고의 위상을 차지하는 왕릉으로 보인다. 순장자들은 하나같이 반듯하게 누워있다. 모두 사약을 먹여 죽게 했다는데, 그 모습이 다양하다. 비치된 자료를 참고하면, 30대 남성과 8세 여자아이(부녀)의 순장은 어른이 아이를 안고 누운 모습으로 추정되며, 30대 남녀의 순장 두 사람이 머리를 서로 반대로 두고 몸을 겹친 상태로 묻혔던 것으로 추정하면 부부였을 가능이 있다고 한다. 10대 소녀 2명의 순장 두 사람 모두 몸을 편 채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 10살쯤의 여자아이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에서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니, 그 수가 많을 때에는 1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고분발굴을 통해 고대사회 지배층에서 순장이 널리 성행하고 대대적으로 실시되었음이 밝혀졌다. 고대국가 중 대가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순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 고분군44호는 40명 이상이 순장 되었다고 추정한다. 이런 대규모의 순장사례는 삼국시대 다른 고분에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이 고분의 순장자는 다양한 신분과 역할을 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왕의 주변인물이 아니라 마부, 농부 등 각 직업군을 고루포함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예견된 죽음 앞에 참담했을 그들의 모습이 애달프다.고령에는 가야의 예술을 접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다.정정골에 차지한 우륵 박물관에서 우륵과 가야금을 테마로 가야의 흔적을 더듬었다. 악성우륵의 가야금 음악으로 승화시킨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돌아보며, 우리 민족의 대표적 악기인 가야금 탄생 이전 고대 한반도에서 전승 향유되어온 음악상 및 가야금 관련 다양한 음악자료를 비교 감상했다. 아울러 대가야에서 발원한 가야금 음악이 어떻게 변화 발전되었는지 가름해봤다. 우륵은 수많은 연주곡을 지었으나 현재는 12곡의 이름만 전해져 온다.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 줄은 명주실을 꼬아서 만든다. 12줄은 1년 12달을 상징하는데 제일 굵은 줄 제1현은 80가닥이고, 제12현은 30가닥 정도다. 우륵박물관 해설을 마친 해설사는 가야금으로 아리랑을 연주하여 다 같이 합창했다.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한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가야는 역사의 뒤 안 길로 사라졌다. 이번 견학을 통해 대가야인들의 숨결과 그 삶의 공간을 느낄 수 있었다. 아울러 미처 몰랐던 다양한 문화로 꽃핀 고대국가 대가야의 멋과 매력을 발견하면서 문화유산에 대한 소중함을 더욱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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