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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구형왕릉 참배기

백필기 문학박사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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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동창생들이 오랜만에 나들이에 나섰다. 모교에서 동문회가 열린다기에 승용차를 이용해서 가기로했다. 꽃피는 춘삼월의 주말인데, 상춘객이 많이 나올 시
기라서 찻길이 밀릴 것으로 예상되어 일찍 나서기로 했다. 참가인원이 불어나서 칠인승 차로바꾸었더니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할수 있어서 운행시간이 단축되었다. 예상하지 않았던 여유에 봄 운치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젊은 시절에 임직했던 담당지역에알려지지 않은 가야 마지막 왕의 석총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보기로 했다. 주소를 검색하고 고속도로에서나와 산청으로 향하는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길손을 반겨 맞는 벚꽃길의꽃비 사이로 우아한 목련화의 유혹에연분홍 복숭아꽃, 하얀 배꽃의 아련한 향연으로 시골길의 운치는 매혹의비경이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고개화시기를 바꾸어 한꺼번에 꽃을 피워서 아름다움을 한 아름 안겨주는사월의 봄나들이였다.찾아가는 구형왕릉(仇衡王陵) 표지판이 안내를 시작했다. 계곡으로 가는 좁은 찻길로 오르니 신축 출입문안의 호석과 문무석 조가 좌우에서맞았다. 천년석과 제작연대가 확연히 다른 일곱 석단 앞에는 근자에 만든 가락국 양왕릉(駕洛國讓王陵) 묘표와 혼유석 향로석을 밝힐 장명석이세워져 있었다.가야국 마지막 왕 십대 구형왕릉앞에 간소한 제물을 차려 잔을 올리고, 신발을 벗고 왕의 영령에 참배하였다.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멸망한마지막 왕이라서 죄책감에 석릉에서잠들기로 자청하였던가. 딸을 시집보낸 나라에 국권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임금의 흉리는 어떠하였을까.구지산의 기적으로 풍요롭게 살던 나라를 선양하는 가락국 양왕의 한이서려 되돌릴 수 없는 회한을 안고 돌무덤에 잠들었나보다. 권력도 허무하고 인생도 무상해지는 허탈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가파른 경사의 돌담 곡장을 따라 오르니 일곱 석단 위에 언덕과 걸쳐진 타원형의 기다란 석릉이 있었다. 아무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일지라도 사람이 오르기 어려운가파른 북향 산비탈에 국왕의 유해를안장할 수는 없다.일곱 석단이나 석묘와 예전에 없었던 돌담 곡장도 천 년 전 석물로 보기는 어려웠다. 석단 앞의 묘표나 혼유석과 향로석 장명석 조형석물도 근자의 조각물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왕릉을 안내하던 사십여 년전의 지역담당관이 예전과 달라진 석릉을 보며 섭섭해진 마음을 토로했다. 많지 않은 돌이 무너져서 현재의석단 앞에 흐트러져 있었고, 조형물과 석물은 없었다고 했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과 다르게 많은 돌을 유입하여 웅장한 석단을 쌓아올리고 봉분 둘레에는 돌담 곡장을 쌓아서 새로운 묘표와 혼유석과 향로석이 세워졌다고 기억을 풀어내었다. 진실왜곡근절에 앞장서야 할 관에서 주도하여왕릉 형태의 변형을 구상하고 감리했으리라는 생각이 그리 쉽게 지워질수 있을까. 의아심이 일어서 탐색에마음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이 돌무덤이 왕릉이었더라면 묘표와 혼유석이나 향로석을 설치하지않았을 리가 있었겠는가. 경남 산청군 화계리 산 16번지에 있었던 돌무덤을 “구형왕의 능이라고 전해왔다”고 기록된 「왕산사기」의 확실성 없는 근거로 1971년 2월 9일부터 사적214호로 지정했는데, 이 때 왕릉 형상으로 개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가락국 금관가야 10대 구형왕(仇衡王, 讓王 521~532년)은 가야국 시조김수로왕의 10세손으로서 서기 521년에 가락국 10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신라 23대 법흥왕 19년에 광개토대왕과 동맹 침공으로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을 보호하려고 532년 구형왕11년에 나라를 선양하여 수많은 살상을 면하게 했다. 죄책감에 돌로 묻으라는 유언에 왕산 기슭에 묻혔다고 구전(口傳)되었으나,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가락지품천(산청) 방장산 속 왕산으로 이거하여 수정궁을 짓고 삼십 년을 세수로서 왕이나 다를 바 없이 기거했던 기록이 있었다고 하니 구전의 신빙성이황당하지 않은가.양왕은 세 아들을 두었고, 증손 흥무대왕 김유신(595~673년)이 수정궁을 옮겨짓고 제향을 받들어 덕양전이라 했다.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한 신라 30대 문무대왕이 5대 외손이었다.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권 31 산음현 산전조에 “돌로 쌓은구릉이 있는데, 세속에는 왕릉이라고전한다” 라고 기록되어 구전에 의한수록이고, 왕명을 밝히지 않아 분명한 기록이라고 보기 어렵다. 홍의영(1750~1815년)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내용에 “1793년 정조 17년산청군 유생 민경원이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면서 비를 피하다가 왕산사대들보 위의 목궤를 발견했는데, 구형왕과 왕비의 옷과 칼과 영정과 ‘구형왕릉이라 전해왔다’고 기록된 산사기를 발견하여, 덕양전을 짓고 추모제를 지낸다” 라고 확실하지 않은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왕산사는 1636년 인조 12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의 방화로 전소하여 효종 때 중수하여, 이 때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왕산사기』는 천 년 전 구전을 인용한 기록이라서 신빙성이 부족하여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이라고 하였다. 전해오지 않은 석물이나 구조물을 만들어 보첨한다고 바른 역사가 되겠는가. 후손을 속여 어리석음을 전하는 형국이 되었을 따름이다.전 구형왕릉에 대한 천 년 전 구전을수록한 분명하지 않은 기록을 근거로삼아서 왕릉의 형태로 개수하였으리라고 여기는 생각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다.전해온 유물을 훼손되지 않게 보존해서 후손에게 전하여 우리의 뿌리를찾고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 선인의 도리이다. 진실이 확인되지 않았더라도전해왔던 그대로 보존하여 후손에게물려주어야 후손이 연구하고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판단하는 것이다.진실을 알아내지 못한 채 유물의 형체를 변형해서 전한다면 후손은 왜곡된 형상을 보면서 연구 근거를 잃어선인의 문화를 영원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고, 바르지 않은 선조를 믿을수 없어 끝없는 원망으로 이어지리니.우리민족 문화의 맥을 이어온 유구한역사에 담겨진 깊은 의미와 진리에서 민초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는 법이다.
고성신문 기자 / gosnews@hanmail.net입력 : 2017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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