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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가뭄이 닥친 고성은 양수기로 물을 퍼올려 겨우 해결했다. |
ⓒ (주)고성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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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영현면 추계리 가뭄 현장에서는 횃불과 양동이가 동원돼 해갈했다. |
ⓒ (주)고성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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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걱정이 연일 끊이지 않는다.
아직 큰 더위도 오기 전인데 해갈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갓 모내기를 해둔 논에는 아이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모들이 물을 내놓으라 아우성인데, 농부는 말라가는 저수지가 야속하기만 하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가뭄 때문에 속이 썩기는 80년 전 농부들도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지금이야 저수시설이라도 잘 돼있지만 그 시절에는 쓸만한 건 모조리 일제에 뺏기기 일쑤고, 조선인에게 돌아오는 몫은 물 한 방울조차도 귀하던 암흑의 시대 아닌가.
하늘은 무심하게도 비 한 방울 내려주지 않고, 땅 위의 물은 매일매일 말라가니 농부들의 마음은 논바닥처럼 타들어갔을 것이다. 양수기로 겨우 물을 끌어다가 논에 대놓으면 또 뙤약볕이 물을 말려버리고, 농부들은 또 다시 덜덜덜덜 동네 시끄러운 양수기를 돌려야했다.
사실은 농부들은 양수기에 손을 댈 수 없었을지 모른다. 쑥쑥 자라고 있는 모를 보면서, 양수기로 물을 대주는 일본군에게 감사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을걷이 후에는 내 몫이 얼마인지, 다 자라지도 않은 벼잎사귀들을 보며 답답한 계산을 해야 했을 것이다.
1990년대에도 가뭄이 찾아왔다. 평지에야 그리고 읍내에서 가까운 곳이야 양수시설, 저수시설도 충분하지만 간혹은 물 대기가 버거운 농지가 있었다. 그런 곳에는 군민들과 군부대가 출동했다.
횃불을 밝혀들고, 잠방이를 슥슥 걷어붙이고, 물을 담은 빨간 양동이를 손에서 손으로 건넸다. 물 한 양동이야 턱도 없었겠지만 한 양동이, 두 양동이 모이고 모이면 당장의 목마름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지난해에도 폭염과 함께 가뭄이 이어졌다. 알곡이 익어야할 논바닥은 쩍쩍 갈라졌고 농심은 그야말로 타들어갔다. 올해도 가뭄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고 있다.
하늘이 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간절함은 하늘에 닿을지도 모른다. 부디, 해갈의 빗방울이 이 땅에 내리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