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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쓰시마에서 출발한 코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부산포에 도착했다. 두 달여에 걸쳐 20만여 병력을 동원해 부산, 동래성을 함락한 일본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가는 세 개의 노선으로 나눠 한양으로 향했다.
이때 일본이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 있다.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오기 1년 전부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은 왜군에게 밀려 불리했던 전세를 순식간에 역전했다.
굳이 영화 ‘명량’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충무공 이순신은 이름만으로 가슴 뜨겁게 하는 성웅이다. 왜군의 두 번의 침공에도 이 땅을, 이 바다를 지켜낸 충무공 이순신. 어쩌면 고성만큼 충무공과 연이 깊은 곳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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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아있는 적진포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충무공 이순신은 옥포와 합포해전에 이어 적진포에서 세 번째로 왜군을 무찌른다. 1592년 5월 4일, 본영인 여수에서 출항한 충무공의 함대는 현재의 통영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인 당포에서 일본 수군을 분파한다.
나흘 후인 5월 8일, 지금의 창원시 귀산면 남포리인 남포항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고리량에 왜선이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 길로 충무공은 전선을 둘로 나눠 남해의 섬 사이를 샅샅이 수색했다. 돼지섬을 지나 당도한 적진포 앞바다에서 포구에 배를 매어놓고 상륙해 재물을 탈취하던 왜군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왜군은 아군의 움직임에 당황해 산으로 도망치던 중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수군은 포구로 돌진해 대선 9척과 중선 2척 등 11척을 분파했다.
적진포해전은 이후 왜군과의 해전에서 자신을 갖고 더욱 적극적인 전략을 펼칠 수 있게 된 출발이었다.
아쉽게도 적진포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아 한동안은 통영 광도면 적덕리 일대를 적진포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적진포는 사실 고성 거류면 화당리에서 신용리에 이르는 남촌진 인근과 동해면 내산리 적포에 이르는 지역이다.
비록 지금은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거류면 화당리에서 동해면으로 향하는 적진포를 달리고 있자면 시원한 바닷바람 사이로 400년 전 충무공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는 것 같다. “왜선이다, 돌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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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의 승전고를 울린 역사의 바다, 당항포
당항포는 고성 동해면과 창원 진북면의 좁은 물길로 바닷물이 드나든다. 하늘에서 보면 닭의 머리 중에서 목에 해당하는 당항포는 당항만 깊숙이 자리한 탓에 물결이 거의 일지 않는다. 호수처럼 잔잔한 덕에 해양레포츠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3년에 한 번 당항포에서는 세계적인 축제가 열린다. 공룡을 고성의 브랜드로 자리잡게 한 경남고성공룡세계엑스포의 현장이 바로 이 곳이다. 1억 년 전에는 공룡이 이 곳을 지배했다면 400년 전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이 바다에서 왜군을 무찌르며 조선을 구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개월째였던 1592년 6월, 당포에서 한 차례 해전을 치른 충무공은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물고 있는 것을 탐지했다.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51척의 함대로 왜선 26척을 격파했다.
왜란 초 숱하게 공을 세우며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충무공 이순신은 2년 후 또 한 번의 당항포해전을 치른다. 한산도에서 왜군의 동향을 살피던 중 1594년 3월,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파악했다. 충무공은 삼도수군을 견내량과 증도에 배치해 왜선이 후퇴할 수 없게 하고 그대로 당항포에서 왜선을 10척을 격파했다. 이어 포구에 정박한 21척의 왜선까지 모두 불태우며 주도면밀한 작전을 완수한다.
두 번의 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의 기백이 살아있는 당항포에서는 충무공의 승전을 기리는 전승기념탑이 당항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전승기념탑 뒤로는 해전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 충무공의 전략과 기술, 해전장면과 함께 당항포해전의 승리에 숨은 공로자인 기생 월이 이야기를 담은 당항포해전관이 자리잡고 있다.
해전관 언덕 아래에는 이순신 장군의 투구를 본뜬 충무공디오라마관을 만날 수 있다. 디오라마관에서는 충무공의 일화들을 올망졸망한 미니어처로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하면 빠질 수 없는 거북선도 당항포에서는 실물모형으로 만나볼 수 있다. 길이 22m, 폭 7.2m의 거북선체험관에서는 거북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물론 구조와 원리, 함포에 대해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함포 쏘기, 노젓기, 키 조정 등 직접 체험하며 배울 수 있는 학습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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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무공의 쉼 그리고 재정비, 소을비포 성지
충무공 이순신이 남긴 임진왜란 당시 기록 ‘난중일기’의 1592년 5월 4일 기록에는 ‘그 시각에 여러 장수들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거느리고 떠나 경상우도의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자 날이 저물기로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고 돼있다.
또한 다음날에는 ‘소비포에서 새벽에 출항하여 두 도의 수군이 모이기로 약속한 곳인 당포 앞바다로 급히 달려갔으나 그 도의 우수사 원균은 약속한 곳에 있지 않았다’고도 기록돼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소비포’는 하일면 동화리의 소을비포성지다.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 나서기 전 머물렀던 소을비포는 대한제국과 함께 그 모습을 감췄다. 고성사람들의 입을 통해 겨우 흔적만 남기고 있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남해안 관광벨트 사업으로 소을비포성지로 거듭났다. 소을비포성지에는 동문지와 서문지, 북문지 등 세 개의 문지와 잔디공원으로 조성돼 이순신 장군의 출항 장면을 그리며 산책하기에는 그만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은하수가 촬영되기도 하는 등 사진 명소로도 알려지면서 마니아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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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명대사와 충무공의 지략이 깃든 운흥사
하이면 와룡리 향로봉 남서쪽에는 1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자그마한 사찰이 하나 있다. 한적한 이곳은 봄이면 영산대재가 열려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고 국태민안을 빈다.
통일신라 문무왕 당시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운흥사는 승병의 본거지이기도 했고, 충무공 이순신과의 인연도 깊다.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는 승병 6천여 명을 이끌고 운흥사를 중심으로 왜적과 대항한다. 충무공 이순신은 사명대사와 수륙양면작전을 상의하기 위해 운흥사를 세 번 방문했다고 한다. 이런 것으로 미뤄볼 때 운흥사와 고성이 얼마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운흥사는 승병 규모에 대한 기록은 물론 당시 천진암과 낙서암 등 9개의 암자가 딸려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그 규모가 아주 컸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지금은 한적하고 고요한 산사다. 왜란 이후 조선 후기 들어서는 화원 양성소로 유명세를 타면서 의겸스님 등 불화가를 배출한 불교회화의 산실이었다.
몇 해 전까지 영산대재마다 앞마당에서 불자들을 맞이하던 괘불탱화는 가로 8m, 세로 12.6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괘불탱이지만 지금은 보기 힘들다. 대웅전 앞에는 학이 날개를 펼치고 알을 품은 듯한 모습의 장독대가 자리잡아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붙든다.
4월 28일(음력 3월 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생 472주년이다. 당항포 숭충사에서는 충무공의 넋을 기리며 매년 충무공의 탄생일 즈음 제전향사를 봉향하기도 한다. 5월 초, 징검다리 연휴가 이어지며 소중한 이들과의 나들이 계획을 세운다면 역사와 문화, 휴식이 함께 하는 충무공 이순신 기행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