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경찰로 방향을 틀었다. 바다를 누비며 살면서도 어쩐지 가슴 한 켠은 바람이 설렁설렁 지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이 예순에 펜을 들었다. 그리고 예순셋, 백영현 씨는 수필가로 등단했다.
“바다에서의 삶이 고단하기는 해도 인생의 전반기를 성실하게 마쳤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꿈을 생각해보면 제가 추구한 꿈의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어요. 제게는 꿈의 정점이 문학이었습니다.”
백영현 씨는 2014년 2월, 공무원 퇴직을 6개월 앞두고 문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인생의 후반은 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다 위에서, 배에 몸을 싣고 있을 적에는 조타실에서도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철판 밑이 죽음이라는 생각 때문에 도망가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문인의 길을 택하면서부터는 인간이 잘못 관리하면 바다는 지옥이라는 생각을 했고, 인간이 나태해지면 바다를 죽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지긋지긋할 법도 한 바다가 문학을 택하면서부터는 외려 화두가 됐다.
“제 글의 테마는 바다입니다. 바다에 살 때는 문학이 멀고도 험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생각을 곱씹어보면 바다의 허무가 겸손을 가르쳤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는 겸손을, 그렇게 떠나고 싶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던 바다로부터 배웠고 또한 배우고 있습니다.”
그에게 수필가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꿈’이라는 제목의 수필은 ‘나이가 들어 슬픈 일 중 하나가 사람들이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긴, 그렇다. 예순이 넘어 쌍둥이 손자가 있는, 머리가 희끗한 그에게 끝을 묻는 이는 있어도 꿈을 물어보는 이는 없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예순셋의 소년인 그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다. 평생 글을 써야겠다는 꿈, 그리고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처럼 은백색의 큰 바다로 다시 가는 꿈.
문학평론가 이유식, 한상렬 씨는 백 씨의 작품을 두고 “수필문학의 궁극적 향방인 존재인식과 해석이라는 지향에 닿아 있는 그의 작품들은 소소한 일상에서도 의미화를 이룬 작가 정신을 높이 사게 한다. 충분히 한 세계를 이루고 자신만의 성채를 구축해 나가리라 기대된다”고 평했다.
자신만의 성채, 너울거리는 파도 위에 그의 성이 있다.
거제에서 태어난 백영현 씨는 통영수고를 졸업하고 배를 탔다. 해양경찰 공무원으로 재직해 오다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올해 2월 경상대 해양과학대를 졸업한 만학도였다. 모범공무원으로 국무총리상, 옥조근정훈장을 받는 영예도 누렸다. 고성군청 공무원이자 생의 3분의 2정도를 함께 보낸 그의 아내, 전 대가면장을 지내기도 한 김명순 씨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쌍둥이를 낳는 순간도 짜릿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기쁜 순간은 어쩌면 고성문인협회, 에세이포레문학회 회원으로 문인의 첫걸음을 시작한 순간, 그가 쓴 수필이 신인상을 가져다준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서 남들은 마지막을 준비할 나이에 꿈을 좇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제게 늘 힘이 되는 아내 덕분이에요. 수십 년을 한 자리에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공무원으로서 모든 역할을 해내는 우리 명순 씨를 보면 아직도 감동스러울 정도입니다.”
부부로 같이 산 지가 벌써 40년쯤 되면서 아내 이야기와 함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어낸다. 아, 저 여인이 내 아내구나, 싶어 감동한다 말한다. 초로의 그에게 여전히 순정은 가득하다.
“잘 익은 술처럼 향기나는 글을 쓰고 싶어 자판 앞에 앉아 밤을 새워 우는 벌레처럼 쉼 없이 자판을 두드려봤지만 결과는 A4 용지 위에 점철된 초라한 낙서였습니다. 문인들의 문학적 토양 마련이 큰 힘이었습니다. 격려 속에 등단할 수 있음에 고맙습니다. 절차탁마의 겸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바다에서 평생을 보낸 수필가 백영현은 마디 굵은 손을 하고서도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50년을 거슬러 오른다. 문학의 가치를 논할 때면 소년으로 되돌아간 듯한 그의 눈은 윤슬처럼 반짝인다. 그의 글은, 그 눈빛처럼 순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