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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사는 조선인에게는 조선의 집과 조선의 주거권이 필요하오”

하이면 덕명리 출신 독립운동가 정세권
한국 최초 부동산 개발회사 건양사 운영
부동산 개발사업으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조선물산장려회 한글학회 등 지원
막내딸 정남식 씨, 정세권 선생 활동 증언
지금의 서울 북촌 한옥마을 만든 장본인
미스터리 독립운동가, 자료 드물어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3월 10일
정세권 선생은 1920년 한국 최초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세운 후 1930년대 가회동을 중심으로 북촌의 토지를 사들여 근대형 한옥을 지어 조선인들에게 팔았다. 이것이 현재 서울의 관광명소인 북촌 한옥마을의 시작이었다.
ⓒ (주)고성신문사
북촌의 골목길.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발짝 들어서서 시간이 멈춘 골목길을 자분자분 걷노라면 마치 조선 왕조의 어느 시점을 걷고 있는 기분이다. 
처마와 처마가 맞닿을 듯한 좁은 골목 곳곳에는 갖가지 소품들을 파는 가게들이 관광객의 발길을 붙들고, 언덕 아래가 환히 보이는 포토존에서는 아스라이 조선 왕궁의 모습이 담긴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들이 딛고 있는 골목길을 가운데 두고 늘어선 그 한옥들은 사실 600년 전이 아니라 90년 전, 단 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 조선인 정세권. 그는 하이면 덕명리 출생의, 고성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잊고 지낸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였다.

정세권 선생
ⓒ (주)고성신문사
# 고성 청년 정세권, 경성을 뒤흔든 건축왕이 되다
1888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난 정세권 선생은 서당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상을 휩쓸었고, 진주사범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았다. 당시 진주사범학교는 3년과정이었지만 그는 단 1년만에 모든 과정을 마친,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
정세권은 18세에 면장을 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망했다. 경술국치 직후 정세권 선생은 면장직을 사임했다. 고향 덕명리의 초가집들을 기와집으로 바꾸겠다는 꿈을 내려놓고 경성으로 향했다.
청년 정세권의 눈에 경성은 더럽고 가난한 곳이었다. 도심에는 번듯한 신작로가 나고, 전차가 길을 가로질렀지만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오물로 뒤덮이고 도시 빈민들이 아귀 같은 삶을 이어가는 곳이 경성이었다. 정세권 선생은 이 도시를 반드시 내 손으로 정리하리라, 다짐했다. 당시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경성의 주거난이 심각한 때였다. 
1910~1920년대의 경성. 쓰개치마로 얼굴을 꼭꼭 가린 채 살던 조선의 여인들은 통치마와 양산을 쓰고 세상으로 나왔고, 양장을 차려입고 손목에 지팡이를 건 채 신작로를 거닐던 지식인들이 살던 시절.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삼키려는 야욕이 그득했던 일본인들이 조선땅에 들어와 처음 정착한 지역은 명동 일대였다. 청계천 남쪽이라 남촌으로 불리던 지역을 차지한 일본인들은 점차 북쪽으로 그 세를 넓히려했다.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경복궁으로 출퇴근했다는, 세종대왕의 스승 맹사성은 가회동의 꼭대기에 살았다. 가회동은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의 저택이 모여 있던 동네다. 요즘으로 치자면 청담동, 평창동 정도 되는 부촌이자 귀촌이었다. 삼청동과 계동, 낙원동, 가회동 일대의 북촌은 조선왕조 600년동안 왕조의 권위와 조선의 정갈함, 존귀함을 유지해온 동네였다. 그러니까 일제에 뺏길 수 없는, 조선인의 자존심이었던 동네다. 내줄 수가 없었다.

# 집장사가 아닌, 조선인의 주거권을 위하여 일본과 맞서다
1920년 회사령 철폐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한 정세권은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가회동의 일본인과 친일파 소유 토지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토지를 분할해 전기와 수도시설을 갖춘 근대식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씩 조선의 집을 늘려갔다. 조선사람이 살려면 조선의 집이 편하다며, 전기와 수도가 다 들어온 서양식 주거공간이지만 뼈대는 한옥을 고집했다.
집장사 정세권은 건설업으로 쌓은 부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썼다. 학창시절 국사교과서에서도 볼 수 있었고 시험문제에도 단골로 출제되던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사실은 그의 등장으로 힘을 얻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살던 집은 그의 살림집이자 조선물산장려회의 본부였다.
그는 집을 판 돈을 백범 김구의 심부름꾼에게 통째로 내놓기도 했다. 한글학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면서도, 집장수 정세권은 집을 짓고 팔아 만든 자금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썼다. 
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일본의 자금을 지원받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민족자본으로, 경제적 자주권을 유지하는 것이 그의 자존심이었다. 토지 매수부터 기획과 설계,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했다.
당시 일본인들은 날로 세를 확장했다. 조선인의 주거지까지 눈독을 들였다. 정세권 선생은 내 나라, 내 땅에서 주거권까지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선인은 조선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막기 위해 북촌 재개발을 시작했고 인근 창신동과 서대문, 왕십리에 이르기까지 한 해 300채 정도의 도시형 한옥을 지으면서 경성의 건축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는 단순한 ‘집장사’가 아니라, 조선인들의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 일제의 도시계획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일이었다. 일본에게 정세권 선생은 눈엣가시였다. 
1930년대, 총독부에서 정세권 선생을 불렀다. 일본집을 지으라는 명령이, 사실은 탄압이 시작됐다. 그러나 정세권 선생은 “일본집은 지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거듭된 요구에도 굴하지 않고 정 선생은 “나는 일본집을 지을 줄 모른다”며 호통을 쳤다. 
조선인이라는 그의 자존심은 양장을 하지 않고 언제나 차려입던 한복과 아침마다 읊던 시조 그리고 일본에 결코 굽히지 않던 기개에 모두 담겨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건설업 면허를 뺏아 버렸다. 해방 2년 전이었다.

1935년 한글학회의 대전 현충사 방문 기념사진. 사진 왼쪽 첫 번째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인물이 정세권 선생이다.
ⓒ (주)고성신문사
# 이 땅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
“1933년, 제가 소학교 1학년이었던 어느날 아침이었어요.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젯밤에 어느 심부름꾼이 와서 군자금을 달라고 해서 집 판 돈을 내놨다 하시더라고요. 알고보니 그 독립운동가는 백범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정세권 선생의 막내딸 정남식 씨는 ‘씨’라는 호칭이 죄송스러울 정도의 나이, 90세다. 
서울의 가장 노른자위 땅에 집을 짓고 팔았다. 미장이와 목수가 많을 때는 300명, 적을 때도 200명은 너끈히 넘었다니 건설업으로 대한민국을 호령했을 법도 한데 정세권 선생은 그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8남매를 대학까지 공부시킨 것 외에는 남은 재산도, 물려준 재산도 없다.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 덕명리에서 자아 올려보낸 명주실 같은 것들을 받아서 옷감을 만들어 염색해 팔기도 했어요. 고향 덕명리도 살리고 한국의 옷감도 살리면서 조선인들에게 이득이 돌아가게 되니 아버지께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1923년에 시작됐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929년 정세권 선생의 참여로 다시 한 번 부흥한다. 
그녀가 5살쯤 됐을 때, 낙원동 300번지 4층짜리 건물에 살았다. 1층은 건양사였고 2층은 조선물산장려회에서 만든 물품들을 파는 가게였고 3층이 가족들의 보금자리, 4층은 조선물산장려회의 본부였다.
그는 고향의 교육 발전에도 관심이 많았다. 1939년에는 고향 덕명리에 학교를 지었다. 1993년 폐교된 하이초등학교 덕명분교다.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양사원이라는 민족교육기관도 세웠다. 나라의 발전과 독립의 근간은 교육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는 한글학회의 고문이었어요. 회관을 지어서 기증했고, 운영비를 지원했습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였고, 만주동포구제회를 만들어서 김좌진 장군 유족 등 만주에서 순국하신 조선인들을 지원하고 민족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신간회 경성지회에서도 활동하셨어요. 건설업은 어찌 보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그러나 일본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42년 정세권 선생과 한글학회 활동을 함께 했던 학자 33명과 증인 48명은 이북의 형무소로 끌려갔다.
정세권 선생은 집을 지어 팔아 마련한 돈으로 형무소에서 동지들을 다시 데려왔다. 그리고 종로에 회관을 지어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다. 그러나 일본은 정세권 선생이 양사원에 지원했다는 이유로 자양동의 부지 3만 평을 압수하고 건양사의 건축면허를 취소했다.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곧 돈줄이 막혔고, 독립운동자금 조달이 힘들어졌다.

정세권 선생은 타고난 명석함으로 진주사범학교를 1년만에 졸업한 후 18세 때 면장을 맡았으나 경술국치 이후 경성으로 올라갔고, 경성의 건축왕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동시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사진은 1930년대 정세권 선생의 가족사진
ⓒ (주)고성신문사
# 독립운동가 정세권, 더 이상 미스터리여서는 안 된다
“아버지 땅에 농사 짓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 정부에서 지주제도를 없애버렸어요. 해방 이후인데도 땅을 뺏긴 셈이지요. 조선을 사랑했고 독립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말이에요.”
막내딸 정남식 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한복을 입던,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조선을 위해 살던 사람이었다. 희망을 안고 고향 덕명리로 내려가 길을 만들고, 밤나무를 심으며 고향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덕명리의 산은 겉는 흙이어도 속은 돌산이라 밤나무 같은 유실수는 심는 족족 2년을 못넘기고 말라죽었다.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해 그토록 애를 썼는데도 나라는 금세 정세권 선생을 잊었다. 선생은 1965년, 고향 덕명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내 고향을 지키던 유해마저도 지난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고, 이제 고성에 남은 것은 유택이 있었다는 흔적과 70년 전 선생이 만들고 지금은 간간이 시제 때나 문을 여는 종대 건물뿐이다.
그렇게 열정 넘쳤던 아버지의 말년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송함에 수화기 너머의 구순 노인, 정남식 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함은 어쩌면, 이 땅의 독립과 고향 고성을 위해 마지막까지 모든 힘을 쏟았으나 그를 잊고 사는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930년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조력한 미스터리 독립운동가 정세권. 그러나 2017년의 정세권의 존재는 더 이상 미스터리여서는 안 된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7년 0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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