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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이념의 대립으로 한반도가 전쟁을 멈추지 못하던 50년대 초. 보릿고개는 당연하던 시절이었지만 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큰 굴곡 없이 자랐다. 가난이 삶의 멍에가 돼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꾸던 친구들이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는 동안 소년 최윤갑은 읍내 중학교까지 가서 공부했다.
“전쟁 중에 태어났는데도 아버님께서 마암면장을 지냈으니 부모님 잘 만난 덕에 고생을 모르고 자랐어요.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그저 무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크게 고생하지 않고 성장해 결혼해서 아들 둘 낳고 결혼시켜 손자 셋까지 봤으니 그 또한 감사한 삶이지요.”
고생 모르고 자란 소년 최윤갑은 청년으로 훌쩍 자라 비료회사의 무역부 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70년대 후반에 해외영업을 담당했으니 엘리트였다. 그래서 더 큰 꿈을 품었다. 1994년, 40대 초반의 그는 직물 원단 무역회사를 설립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부모님께 배운 신용과 정직은 그의 사업 성공 밑천이 됐다.
“사업이 안정되고 세월이 지날수록 고향이 그리워지더군요. 어린 시절 소를 끌고 들판을 누비던 기억, 마암면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해 걷고 걸어 오가던 고성중학교까지의 등하굣길과 함께 그 시절을 보낸 친구들까지, 어느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우회에 더 관심을 갖게 됐던 건지도 모릅니다.”
사업이라는 것이 그렇다. 처음부터 대박을 치는 것은 백에 하나, 천에 하나 꼽을 정도고, 초기에는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겪는다. 초짜 사업가 최윤갑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다른 이들보다 가벼운 시련이었노라고.
그래서 그게 또 감사해 어떻게든 베풀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고향을 위한 나눔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재경고성향우회원으로 시작해 재경마암면향우회장, 재경고성중동문회장과 재경고성군향우회 감사, 부회장까지 맡았던 그는 2012년 6월에는 고향의 후배들을 위한 교육발전기금 1천만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3천700명에 이르는 재경고성향우회원들을 이끄는 1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향우회 기금을 조성해 고향의 어려운 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마음 같아선 고향의 좁은 농로들을 키우는 공사도 하면 좋겠지만 사업가보다 관료 출신이 많은 재경향우회 특성상 아직까지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재경향우회가 고향을 위해 아주 작은 일 하나까지도 신경 쓸 수 있는 향우회가 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최윤갑 회장은 향우회장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고향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보다 앞서 성금 모금에 나설 것이다. 당장 몸집을 키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십시일반 기금을 조성하면 장학사업도, 고향희망심기운동도 더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재경향우회원들의 결집이 우선이다. 그는 읍면향우회를 중심으로 단단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매년 진행되는 임원 신년인사회는 물론 가족동반 등산과 연말 정기총회 등 향우회 연례행사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게 곧 향우들 간의 소통과 화합의 장이라는 생각이다.
“지난 한 해는 국내외적으로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올해는 국가의 새로운 지도자가 선출될 것이고 그를 중심으로 국론을 통일하여 국가는 물론이고 사회와 가정도 안정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고향 고성을 위해 전진하는 재경향우회가 될 것입니다. 고향 고성의 눈부신 미래에, 재경향우회가 함께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