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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 ‘나 혼자 이렇게 앉아 있어도 그 사람 오지 않네, 이곳에 와서 만난 그 사람 지금은 왜 못 오시나.’
어둠이 내린 카페에 홀로 앉아 옛 연인을 기다리는 여 의 그리움이 가수 최진희의 목소리로, ‘카페에서’라는 제목을 달고 전국에 퍼졌다. 80년대 누구나 흥얼거리던 이 노래가 사실은 고성 사나이의 손에서 탄생한 곡이라는 걸 아는 고성사람은 흔치 않다. 작곡가 이동훈. 구만면 출신인 그는 최진희, 조항조 등 트로트계의 거목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는 음악인이다.
“지금까지 발표한 곡만 1천 곡 정도 됩니다. 악상이 떠오를 때는 쉽게 한 곡이 완성되지만 어떤 곡은 몇 달 가야 겨우 완성되기도 해요. 요즘은 라디오에서 노래 강의도 하고, 지난해부터는 한국가요작가협회장을 맡아서 대중음악 작가들의 복지나 공연활동 등을 챙기고 있습니다. 워낙 일복이 많아요.”
걸출한 가수들과의 곡 작업은 물론이고 70년대 이화여대에서 실용음악에 대해 강의한 것에 이어서 아직까지 공연이며 방송 등등,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쉴 틈이 없다.
케이팝이 세계를 휩쓰는 시대다. 그러면 가요의 질이 높아져야 하는데 양적으로는 성장했을지 몰라도 외려 질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중문화는 대중이 인정하고 가까이 접하고 즐겨야 한다. 그래서 그는 가요작가협회의 수장을 맡았고, 젊은이 못지 않은 열정을 쏟고 있다.
“구만초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부산으로 진학했어요. 고등학교 시절 선배가 중학교 교사였는데, 피아노와 기타를 잘 다루던 분이었거든요. 그 선배가 콘서트도 열곤 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 취미로 시작한 음악이 평생의 업이 됐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겨웠던 시절, 음악하는 사람들은 ‘딴따라’라며 천시받기 일쑤였다. 음악을 한다고 하니 집안이 한바탕 뒤집혔다. 그도 그럴 것이 구만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특출난 성적을 거두던 모범생이었고, 장자였으니 집안의 기대는 그에게 쏟아졌다. 집안에서는 그가 법조인이 되길 바랐다.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엄포를 듣고도 도통 포기가 되질 않아 숨어서 음악공부를 했다. 그게 벌써 50년이 지난 이야기다.
“구만면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봄이면 뒷동산에 지천으로 피던 진달래를 한아름 꺾고, 실개천을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 이파리를 따 풀피리 불고, 개천에서 물고기 잡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시절의 감성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음악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고향 고성의 노래를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고성을 그리는 노래는 몇 년 전 한 번 시도했던 일이다. 제작과정, 가수 선정문제 등으로 보류했던 그의 계획이 부활했다. 좋은 시를 받아 가사도 생겼고, 지금은 거의 완성단계다. 그러니 조만간 고성이 배출한 작곡가 이동훈의 작품으로, 고성의 노래가 불리게 된다.
고성에 자리잡은 그의 후배들과 제자들은 고성사람이지만 오히려 고성사람들에게는 덜 알려진 작곡가 이동훈의 이름을 붙여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고향 고성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른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는 고장입니다. 인물의 고장이기도 하지요. 저에게 고성은 어머니의 품속 같고, 저의 태와 같은 곳입니다. 노래가 주는 힘은 생각보다 큽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고성군민의 모든 순간에 저의 곡들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