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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달래려 쓴 일기가 쌓이니 역사가 된 거지”

55년 삶 일기로 기록한 영오면 서보명 할머니
스물세 살 시집온 직후부터 일기 쓰기 시작
백혈병으로 잃은 큰아들 12년 작고한 남편 이야기 등
매일매일 쓴 일기장만 100여 권, 쪽지까지 상자만 두 개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6년 12월 23일
서보명 할머니는 갓 결혼한 23살부터 지난 55년간 일기를 쓰면서 고달픈 마음을 다스렸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할머니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막내딸이 태어나기 전 서보명 할머니의 가족사진
꽃 같은 나이에 지독히도 없는 집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살림보다는 친구들이 더 좋은 사람이었다.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가슴은 늘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했다. 스물셋의 새댁은 고달픈 일상을 접으려 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었다.
“내가 시집온 기 1962년이다. 사는 기 엄청시리 대서 우찌 할 줄을 모리긋드마는, 글로 몇 자 써보이 숨통이 틔는 기라. 그기 이리 쌓이고 쌓이가 은자 내 역사가 된 기지.”
서보명 할머니의 일기장은 겹쳐놓아도 침대를 그득 채운다. 누렇게 빛이 바랜, 하도 펼쳐봐서 튿어진 귀퉁이를 명주실로 질끈 동여맨 일기장부터 두툼한 대학노트까지, 모든 것은 할머니의 말처럼 할머니의 역사가 됐다.일기장을 보여 달랬더니 사과박스를 하나 꺼낸다. 
생각보다 적은데, 싶은 찰나. 할매가 커다란 여행가방을 들들거리며 끌고 온다. 세상에, 50년도 더 된 유물 같은 일기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기장을 미처 못 챙긴 날이면 밖에서 종이를 꼬깃꼬깃해가며 기록했다.
갓 시집와서 매일이 눈물바람이던 시절부터 첫아이를 낳았을 때의 감동, 남편 때문에 속 썩던 밤이면 눈물과 한숨으로 지샌 밤과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의 졸업식도, 장성한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올망졸망한 손자들이 태어나던 순간도 모두 펜촉에 잉크 묻혀가며 일기장에 담아뒀다.
스물셋에 시집 와서, 없는 살림에 고생도 참 많이 했다. 할매는 왼쪽 눈이 잘 안 보인다. 처녀 적에도 그랬으니, 부모님은 장애가 있는 딸을 남의 집에 보낼 수 없어서 늦게 늦게 시집을 보냈다. 
시집 와서도 장애는 멍에가 됐다. 큰 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살았다. 마음을 풀어놓을 데가 없었다. 오로지 일기장 밖에. 옛날 이야기를 조곤조곤하면서도 신명을 섞어 풀어놓던 할매 눈가가 갑자기 붉어온다. 
큰아들을 다 키아 놓고 이자삣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다 아이가. 아들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고마 내가 대신 아푸모 좋긋다 싶데. 일기 안 썼으모 내가 우찌 살았으꼬, 시푸다. 30년도 넘었는데 아직까지도 어제 본 것 긑다 아이가.” 
34년 전, 할매는 생떼 같은 큰아들을 잃었다. 백혈병이었다. 할매는 아들이 입원한 서울대병원에서도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오늘은 어떤 치료를 했고, 오늘 내 새끼는 어땠으며, 분신 같은 내 자식 살려달라는 기도도 했다. 미어지는 가슴을 오롯이 기록으로 남겨뒀다. 그 시절의 기록들을 살피는 할매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다가도 또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남편은 안 있나. 친구들을 참 좋아했다 아이가. 그라모 또 새댁이가 돼 놓응께 아 아부지를 고마 집에 오라꼬 살 수가 없는 기라. 그래가 내가 머리로 짜내기로, 아 아부지요, 시아부지가 밴소 다녀오시다가 자빠짔슴미더, 아 아부지요, 산치가 도망을 가가 우짜모 좋긋소, 이람서 불러가 집에 오고 그랬다. 그기 요 다 들어있다. 지금 생각항께 또 할배가 생각나네.”
50년이 넘게 일기를 써왔으니 문장력은 웬만한 작가 못지 않다. 그래서 할매는 지난 12년에 할배를 하늘로 돌려보내면서 편지도 한 자 썼다. 장례식장에서 발인을 몇 시간 앞두고 휘뚜루마뚜루 쓴 글이라지만 일기에도, 할배한테 보내는 편지에도, 할매의 마음은 절절하다.
할매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2016년 12월 21일, 날씨 비, 오늘은 고성신문에서 취재를 왔다고, 55년동안 일기를 썼더니 신문에 낸다 하더라고, 아들 이야기도 하고 남편 이야기도 했다고. 할매 가슴 속에 들끓는 것들이, 일기장에서 춤을 춘다. 
“큰아들은 하늘나라에 갔어도 다른 자석들은 다 잘 살고 있다. 아롱이 다롱이 아이가. 둘째는 공무원이고, 다 즈그 모가치 잘 하고 살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고. 은자 엄마 일기들로 엮어가 책이나 한 권 내줄랑가.”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쓰던 할매가 홀홀 웃는다. 77살인 할매가, 웃는 건 여전히 23살, 시집온 그날 그대로다. 
최민화 기자 / 입력 : 2016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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