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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고성군어업협동조합이 들어선 후 새벽 경매가 이뤄지던 성내분소는 201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 삶을 가장 원초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시장이다. 막 밭에서 캐온 싱싱한 푸성귀며, 새벽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들을 보고 있자면 신기하게도 삶에 대한 에너지가 차오르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팍팍한 일상에 지칠 때면 일부러 새벽시장을 찾는다. 경매하는 이들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와 바다를 가르던 강인한 생명력이 펄떡이는 새벽 경매는 색다른 즐거움이다.
지금이야 어시장이 고성시장으로 옮겨갔지만 고성시장을 새시장이라고 부르던 시절에는 어시장이 공룡시장에도 있었다. 공룡시장 1층 전체가 어시부였고, 2층에는 푸성귀 따위를 팔았다. 고성시장에 아케이드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불과 20년 전만 해도 공룡시장이 훨씬 더 큰 시장이었다.세월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어시부 옆에서 경매도 했더랬다. 철둑에서 새벽 같이 잡아올린 물 좋은 생선들, 철마다 다른 해산물들을 부려놓고 제각기 값을 매기곤 했다. 1960년대 들어선 고성어업협동조합이 있던 시절이다.
어협은 수협의 전신이다. 고성어협은 고성에서 수산물이 제일 풍부했고 지금도 풍부한 삼산면에서 1930년 시작됐다. 40년대 고성지소가 본소로 변경되고, 61년에 동해어업조합을 합병하면서 1962년 고성어업협동조합이 들어섰다.
동이 트기도 전부터 머릿수건을 쓴 아지매, 솜을 두둑히 넣은 무명도포를 걸친 아재들이 새벽바람에 언 손을 아쉬운대로 입김으로 녹여가며 모여들었다. 지금처럼 산소탱크까지 달고 귀한 대접하는 트럭이 있지도 않았고, 솜점퍼도 없던 시절이다. 양철동이에 대야에, 많지도 않은 생선 몇 마리, 미역 몇 줄기 담아서 이고 지고 경매장으로 모여들면 어협에서는 한 푼이라도 더 쳐주느라 이리저리 살피곤 했다.
해산물은 물이 좋아야 하니 경매를 멀리서 할 수도 없었다. 시장 어시부 바로 옆에서 경매도 하고, 낙찰된 해산물은 바로 옆 어시부로 즉시 가져다 날라 새벽 손님들을 맞았다. 새벽길을 걸어 걸어 겨우 경매장에 왔어도 피곤한 줄 몰랐다.
새벽경매로 몇 푼 쥐면 그 길로 시장에 들러 새끼들 먹일 반찬가지 몇 개 사서 또다시 고단한 길을 걸어 걸어 돌아갔다. 그래야만 때 되면 제비새끼들마냥 모여드는 자식들 따순 밥 먹여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그게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젊었던 시절, 1960년대다.
고성에서 제일로 싱싱하고 물 좋은 생선들이 모이던 고성어협 성내분소.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보다는 깨끗한 마트를 찾는 이들이 늘었고, 길들이 자꾸만 넓어지면서 어협 건물은 도로에 편입돼버렸다. 밀치면 삐걱거리던 나무문도, 바람에 덜컹이던 창문도, 신식 건물에 밀렸다. 차들이 많아져서 찻길이 나야 한다며 2014년, 고성어업협동조합 건물은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고성어업협동조합 건물이 고성읍 성내리에 자리잡은 지 52년 만의 일이다.
어협 건물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시장 상인들의 활기찬 새벽은 수남리 수협 공판장에서 이어진다. 해 뜨기까지 한참이나 남은 새벽, 남들은 한창 단잠에 빠져있을 무렵부터 경매사들과 어부들의 이른 일상이 시작된다.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새벽 경매 현장은 추위가 찾아와도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열정이 가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