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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 오늘도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점차 차가워지는 날씨에 어깨를 움츠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낯설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 눈인사 한 번도 없이 지나치는 풍경은 참 썰렁하다. 다들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옆의 사람 얼굴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휑하니 가 버린다. 그게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길이다.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길은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한 도구일 뿐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길은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능이 가장 큰 목적임은 맞다. 그러나 이전의 길은 이동의 기능 이외에도 다양한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우선 길은 ‘나눔의 도구’이기도 했다. 길을 두고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나누어지고, 도시가 나누어지고, 국가가 나누어졌다. 또한 길은 나눔의 도구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소통과 만남의 도구였다. 큰길이 주로 이동을 통한 만남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골목길은 이웃끼리 소통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골목길에서 만난 이웃 사람들과 세상사를 이야기했으며, 부녀자들은 골목의 끝에 있는 우물이나 빨래터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이제 길과 우물이 그런 기능을 잃은 지 오래 되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이 넓어지면서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어지고, 수도가 생기고 우물이 폐쇄되면서 우물가로 갈 일도 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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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이 사는 곳에는 길이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길이 있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가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한 토목 사업은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길은 힘이었다. 길이 많으면 사람이 많다는 뜻이고 사람이 많으면 큰 마을이 되고 큰 나라가 된다.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길도 없다. 한때 융성했던 나라도 길이 막히면 나라가 약해지거나 없어져 버린다. 길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선이다. 연결선이 튼튼할수록 마을이나 나라는 강해진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고성도 그랬다.
이 땅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패총(貝塚)이 있는 것을 보면 석기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선사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모여 산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문자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사포국(古史浦國), 고자국(古自國), 고차국(古嵯國) 혹은 구차국(久嵯國), 소가야(小伽倻)를 거쳐 고성(固城)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 국가를 이룰 정도로 큰 세력이 모여 있었고 긴 역사 동안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았다면 당연히 길도 수없이 많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조상들이 만든 길이 지금도 남아 있을까? 근대화 이후 기존의 도로를 넓히거나 새로운 길을 뚫는 과정에서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닐까? 남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런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행사가 얼마 전에 열렸다. 고성탈박물관이 주최한 ‘천 년의 골목길을 걷다’라는 프로그램이다.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으로 행사의 주요한 키워드는 ‘고성읍성’과 ‘골목길’이다. ‘고성읍성’은 조선 세종 30년(1448)에 완성된 돌로 만든 성으로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되었다. 아울러 이번에 함께 찾아본 ‘골목길’은 성터를 중심으로 조성된 길에서 만나는 조상들의 흔적이다. 특히 옛 골목길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옥골의 골목길은 이번 순례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전부터 이런 프로그램을 절실히 원하던 필자는 이번 행사에 학습자의 자격으로 따라 나섰다. 고고학이나 역사에 대해 특별한 지식은 없으며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짧은 식견에 생각을 보태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행여 역사적인 오류가 있더라도 이해를 바란다.
# 고성에는 천 년의 역사를 가진 골목길이 남아 있다
순례의 시작은 300여 년 전에 오횡묵 부사가 기록한 <고성총쇄록>에 나오는 고성 관아터에서부터였다. 그리고 객사 터를 거쳐 읍성의 흔적을 따라 성내리 골목길을 걸으며 조상들이 남긴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어시정(魚市井)을 돌아본 후에 통티 방앗간(대성떡집) 근처의 옛 나무전 터를 보고, 이어 남문이 있던 영창철공소와 구 낙원골프장 인근의 읍성과 왜성의 성터를 살펴보았다. 그나마 가장 온전한 형태로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성벽의 흔적이 극히 일부분밖에 없어 아쉬웠다. 성 안팎으로 집을 지으면서 훼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무지에 의한 훼손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성벽 근처에는 무늬가 선명한 기와 조각들이 뒹굴고 있었지만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없었고, 남문으로 내려가는 골목길에서는 글자가 선명하게 남은 공적비가 담장 받침돌로 박혀 있기도 했다. 반 쯤 깨진 채 비스듬히 박힌 비석은 문화에 대한 무지가 가져온 비극이기도 하지만 문화와 역사를 모르는 우리 모두의 반성문이기도 했다. 일부러 다시 복원할 필요 없이 그대로 두어 무지의 표본으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양 국가였던 고성의 지형 변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은 ‘죽도’이다. 군청 서편에 있는 죽도는 대나무가 많아 대섬이라고도 불리는데, 바다와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섬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이다. 죽도가 육지로 변한 것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인근 바다를 매립하면서 육지로 바뀌었는데, ‘철둑'의 유래도 그때 매립을 위해 철길을 만들어 흙을 실어 나르면서 생긴 것이다. 경치가 아름다워 신라 때 고성군 태수로 부임한 김양(金陽)이 지었다는 ‘낙열정(樂悅亭)’이 있었다는 곳이지만 이제 정자의 흔적은 없고 대신 고려 말엽에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고성 허 씨의 시조가 되었던 허기(許驥) 선생의 유적비만 뎅그러니 서 있다.
죽도를 내려온 우리는 옥골을 찾았다. 옥골은 읍성 서남쪽의 끝자락에 위치한 동네로 바닷가 바로 옆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보인다. ‘옥천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곳이기에 주거지로는 안성맞춤이었으며, 바로 인근에 관아가 있어 부유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가 없어지면서 이제는 낡은 집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낙후된 곳으로 변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수천 년을 내려온 골목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옥골에는 마을 안이나 집들 사이로 이리저리 나 있는 작은 골목길이 실핏줄마냥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으며, 특이한 것은 오거리로 된 골목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오거리라면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교통 요지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어느 곳이든 펼쳐나갈 수 있을뿐더러 접근도 용이하다. 서외오거리가 대표적인 곳인데 큰길도 아닌 마을 안의 골목길이 오거리라면 뜻밖일 수밖에 없다. 한때 융성했던 옥골 마을의 역사를 증명해주는 증거물이라고 할 것이다.
옥골의 골목길을 걸으며 문득 고성의 고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옥골의 생성과 변천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옥골의 오거리는 3개 지역이 갈라지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성내리, 서쪽으로는 서외리, 그리고 남쪽으로는 수남리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그리고 서외오거리와 예전의 관아였던 군청의 남쪽이 바다와 인접했고, 대섬이 바다였던 점을 생각하면 옥골은 고성에서는 가장 먼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 되어야 한다. 읍성의 남쪽에는 남문 이외에 바다로 통하는 수문이 있어 수문 남쪽 마을을 수음밖, 수남리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수문 남쪽에 나무다리가 있어 고깃배를 대고 어물(魚物)을 어시장으로 바로 들여왔다고 한다. 그만큼 예전의 옥골은 여러 모로 생활에 편리했던 곳으로 패총이 발견된 동외리보다 먼저 고성의 원주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던 곳이 아닐까하고 유추할 수 있는 곳이다.
비교적 옥골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계속하여 읍성 흔적을 찾아 나섰다. 다음에 들른 곳은 전 군수 관사였는데 그 곳은 마침 공사로 주변 흙을 파헤쳐놓아 성벽의 기초석까지 뚜렷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곳 역시 공사로 인해 남은 성벽마저 훼손될 가능성이 있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9세기에 초축되어 고려시대를 거치며 계속 개축되었다고 추정되는 ‘고읍성’과 ‘창거리 우물’을 보고 일정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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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걷는 골목길은 미래와 소통하고 있다
골목길 순례 행사를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평소에 무심코 지나치던 골목의 담벼락이나 우물이 그렇게 깊은 사연이 있는 유적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담 옆에 살면서도 그게 유물인 줄 몰랐던 무지함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골목길을 걸으며 우리는 고성을 만든 조상님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성벽을 쌓을 때부터 있었을 유적의 조각들이 돌멩이 속에 섞여 뒹굴고 있는 모습이 경이로우면서도 부끄러웠다. 스러져가는 성벽을 보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행사는 주민들을 무지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자주 이런 행사를 열어 역사와 문화의 소중함을 느끼고 훼손되고 없어져 가는 유물들을 보존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길은 소통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특히 골목길은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면 큰길에서 볼 수 없는 아기자기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을뿐더러, 골목길을 밟고 지나간 많은 조상님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 역시 먼 훗날 후손들이 우리를 찾아와 대화를 요청할 지도 모른다.
이번 순례 일정에서 들른 어느 떡집에 걸려 있는 ‘1957년 개업’이라는 현판이 인상적이었다. 급격한 변화에 휩쓸려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다보니 창립 60년밖에 안된 가게도 역사가 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역사가 서린 골목길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대단한 자산이다. 이번 행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긍심으로 되살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발판으로 하자는 뜻에서 만든 프로그램이다. 이후에도 고성군에서는 지속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고성 군민 모두가 한번쯤은 꼭 참가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