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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성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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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허종철 교장이 처음 교편을 잡고 담임을 맞았던 합천 자산초등학교 6학년 수업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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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철 교장은 빛 바랜 첫 월급봉투를 인생의 역사라며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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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하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게 더 좋아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국민학생 시절, 교사는 꿈도 꾸지 않았다. 교대에 입학해서까지도 평생을 교단에 서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돌아보니 머리 위엔 희끗한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느 새 ‘선생님’으로 40년 넘는 세월이 흘러있었다.
“20대 초반, 교대를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은 곳이 합천 자산초등학교였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그래봐야 겨우 10살 차이나는 아이들이었지요. 수학여행을 갔는데, 산골 아이들이다 보니 바닷가를 옆으로 기는 게만 보고도 신기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런데 벌써 정년퇴임이라니, 세월 참 빠르네요.”
고성초등학교 허종철 교장은 고성 거류면에서 태어나 학교 다니던 시절을 빼면 내내 고향을 지킨 고성 토박이다. 한 자리에 1시간 앉아있기도 힘든데 60년을 고성에서 나고 자라 고성에서 일했다. 은월리에서 태어나 방산초등학교, 철성중학교, 경남항공고를 졸업했다. 대학시절과 합천에서 근무한 초반 3년을 빼면 1977년부터 고성군내 학교들을 뱅뱅 돌며 39년을 근무했으니 지겨울 법도 한데 그게 외려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모든 제자가 소중하지만 당시에 전국 최우수 모범청소년으로 뽑혔던 이석범이라는 제자는 아직도 기억나요. 그다지 좋은 선생도 아니었는데 성인이 된 제자들이 안부를 전하고 직접 찾아올 때마다 감동스럽습니다. 이 길을 잘 택했구나, 싶어요.”
평교사로만 32년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힘든 순간이 왜 없었을까. 하지만 다음날 아이들을 보면 교사가 천직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42년 하고도 반절의 해를 더 보냈다.
그동안 참 많은 직함들을 얻었다. 어린 시절 만화가를 꿈꾼 사람답게 경남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도 했고, 한국미술협회 고성지부 부지부장은 물론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고성교육사, 고성군지 집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지난 16일, 허종철 교장은 군청을 찾았다. 그리고는 500만 원을 교육발전기금으로 내놨다.
“교육발전위원회가 고성군의 아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지금껏 지켜봐왔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육자로서, 그냥 퇴직할 수가 없었어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해 전부터 마음 먹고 있던 일이니 어찌 보면 또 하나의 꿈이었고, 작으나마 그 꿈과 목표를 이룬 거지요.”
아무리 봐도 천생 교육자다. 단돈 5만 원도 남을 위해 선뜻 내놓기 힘든 세상이다. 기부는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기에 결코 쉽지는 않다. 교육자는 말로만 교육해서는 안 된다. 교사가 직접 실천해야 아이들이 배운다.
“30년동안 취미삼아 해온 서예를 계속 하면서 틈틈이 텃밭을 가꾸고, 집사람과 손 붙들고 여행을 다니면서 제2의 인생을 즐길 겁니다. 악기도 하나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퇴임하면 평범한 촌로로 돌아가야지요.”
스승이 없는 시대다. 교사는 있어도 은사는 없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허종철 교장의 눈을 보면, 누구도 그런 소리는 못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