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주)고성신문사 |
| 여성 대학 진학률이 74.6%라는 요즘 세상에, 딸이라서 공부 안 시킨다는 사람이 있을까. 딸이든 아들이든 대까지 졸업시켜야 ‘공부 끝났다’는 시대다.
부모세대는 달랐다. 오로지 딸이라서, 여자라서 학교 문턱을 넘기 힘든 시절이 있었다.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하고 막내동생을 들쳐업고 학교에 가던 여중생도 심심찮게 보이던 시절이다.문맹을 겨우 벗어나는 정도로만, 정말 딱 학교의 맛만 본 딸들도 있었고, 중학교까지 겨우 졸업하고 빳빳한 여고 교복 깃을 부러워만 하던 딸들도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해 못할, 공부가 너무도 하고 싶었던 1960년대 딸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돌아서면 허리 펼 틈 없이 이어지는 농사에,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거두고, 살림까지 도와야 했다.
1960년대, 도시는 점점 살기 좋아지고 농촌은 점점 살기 팍팍해지던 시절이었다. 1966년, 마암면에서는 새마을학교가 열렸다.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쌀을 생산하고, 더 좋은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지 가르치는 학교였다.
딱히 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가 아니었는데도 동네 아낙들은 물론이고 소녀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수업을 들었다. 배움에 목마른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배를 곯지 않기 위해서는 농사를 배워야 하는 때였다.
새마을학교에서는 일명 ‘계몽영화’를 보고, 농업 선진지를 견학하고, 영농기술을 배웠다. 정식으로 학력을 인정받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지역을 선도할 영농기술자가 되기 위해서 너나 없이 새마을학교를 찾아들었다.
그렇다고 또 아무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서 정해준 인원에 맞춰 추천받지 않으면,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수업이었으니 어찌 보면 마을의 정예요원들이었다. 그러니 젖먹이 동생을 들쳐업고, 코찔찔이 아이들을 앞세우고라도 들어야 했고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은 쉬지 않고 흘렀다. 누구나 먹고 살만 해졌고, 일등 농사꾼을 꿈꾸는 사람들은 오히려 특이한 사람 취급을 받는 세상이 와버렸다. 사진 속의 단발머리 소녀는 일흔 전후가 됐을 것이고, 등에는 동생 대신 손자가 업혀있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들었던 새마을학교의 수업은 이제 추억거리가 됐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