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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오래 전부터 향토인과 지역신문을 통하여 옛 선인(先人)들이 스스로 우리 향토를 ‘소가야(小加耶)’로 칭했는가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적을 소(小)자를 빼고 쇠가야(쇠 철 鐵加耶)로 하자는 등의 논자(論子)들을 대해 왔다.
물론 이 분들은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이론(異論)을 제시하겠지만 그 시대의 역사관(歷史觀)을 통찰하는데 연구의 보완성이 부족한 감을 느낀다. 가야사는 고려시대에 김부식 일당의 사대론자들이 주체적인 가야사의 기록 등을 불 태운 사건 등으로(삼국사기에는 가야사가 없고 지명만 있음:당시 중국 한나라는 금관가야를 민국(閩國:오랑캐나라, 벌레나라), 구야국(狗耶國:사악한 나라로 칭하였다) 내용의 전수가 정립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필자는 삼국유사 편년가락국기, 강역고(정약용 저), 가야사연구(천관우 저), 일본서기, 백제기,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등을 축으로 소가야의 역사 내용을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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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항공촬영한 고성읍 시가지 전경<사진제공= 고성군청 종합민원실 건축민원계 채수천 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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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한의 성립과 고성의 명칭
(1) 삼한의 성립과 소가야
전삼한(고조선의 관경지)은 마한(한반도), 진한(만주 전역), 번한(산둥반도를 축으로 함)에서 후삼한인 마한(충청도, 경기도, 전라도:백제:BC 18년~AD 660년), 진한(경상남북도:신라:BC 57년~AD 935년), 변한(낙동강 유역의 6가야:AD 1세기~562년)이다.
소가야는 변한의 일부인 고성땅을 축으로 발전한 나라다.(AD 300년 전후, 지면 관계상 상세한 설명은 배제함)
(2) 삼한시대의 고성 명칭
➀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성의 초기 국명:2, 3세기 변진 초기)이라는 것이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에 기록되어 있고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소가야로도 불리운 고성은 그 옛날의 명칭이 고자(古自:삼국사기, 각종 지리지) 혹은 고사포국(삼국사기) 및 삼국지에 고자미동국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자(古資)’는 곶(串)의 뜻이며, ‘미동(彌凍)’은 물과 연관된 보통명사다. 즉, ‘바다로 둘러 쌓인 반도’란 뜻이 되겠다.
참고로 고자미동국과 함께 건국된 사천(泗川) 지역은 사물국(史勿國)이고 인접한 삼천포는 구라(仇羅), 구낭(仇良)이라 했다.(2, 3세기
)➁소가야(AD 300~562년)가야(加耶)는 가라(加羅)와 같은 뜻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중심 읍락(邑落)을 의미한다. 낙동강 유역의 가야 발전은 마한과 진한에 비하여 늦게 발전했다.
이유인 즉, 6가야(성주, 고령, 창녕, 김해, 함안, 고성) 등은 백제와 신라의 틈새에서 이들의 정치, 군사적 팽창 세력의 영향이 컸다.
후에 여섯가야는 가야연맹체제를 유지하며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축으로 발전하였다. 6세기초 금관가야가 신라의 침입으로 멸하고(522년) 후기에는 대가야(고령, 함양, 합천)가 맹주가 되었으나 통합된 국가로서의 발전은 없었다.
이로 인하여 5, 6세기 초는 신라의 침입이 있었고 6세기에 접어들어 백제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고성은 6세기, 아마 530년 이후 30여년 간 백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백제삼서가 일본서기에 미친 영향:이근우 저) 그 후 함안(아라가야)과 함께 562년에 신라에 함락 당하였다.
# 왜 소가야가 고성인의 자부심인가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첫째, 소가야 고성은 우선 군사적 요충지다. 백제사를 보면 삼면의 바다와 계곡 및 산의 지형은 적의 공격을 손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백제는 6세기에 고성을 남방의 최후 군사 방어지역으로서 고성 상리를 만계(滿溪)로 책정하여 주둔하였다. 그들은 십여년간 고성에 군령을 두고 세금을 거두었고, 30여년간 백제의 속령으로 그들의 직활지에 임하였다. 고성의 한기(旱岐:지배자)가 백제 성왕의 부름에 2번이나 임하여 금관가야 수복에 관한 논의를 했으며, 이 때 일본서기 흠명왕 편에는 고성을 고차(古嵯), 구차(久嵯)라 불렀다.이와 같이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군사적면에서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통의 발달(해양 및 육로)을 들 수 있겠으며, 견고한 자연방어벽을 갖추었기에 고성(固城)이라 하였다.
둘째, 소가야는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 풍부한 농경문화(고성들녘)를 이루며 생활했다. 초기 고자미동국의 의미가 내포한 수산자원 및 해상의 중계무역을 장악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동해면 내산리고분의 내용물, 송학동고분의 적색 묘실)
뿐만 아니라 금·동의 채굴이 풍요로워 생활 도구와 농기구들이 철제로 되어 있고, 철제 무기 및 갑옷과 토기류들이 소가야의 수준 높은 문화양상을 보여주고 있다.셋째, 고성읍을 중심한 크고 작은 읍락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동외동패총, 서외오거리 주거지 발굴, 각종 토성 주위의 주거 유물 등)4~6세기 가야사회의 읍락을 고찰하면 집단 호수가 큰 것은 4천~5천호, 작은 것은 600~700호로 구성되어 있음을 본다.(국사편찬위원회 조사록)
이러한 표본을 중심으로 볼 때 소가야의 호수는 고성읍지구가 4천~5천호로 충분히 예상되며, 현재 고성읍의 호수는 1만2천360호로 많은 사람이 고성을 떠났다고 증명한다.(조선시대 16만 명, 고성읍장들의 증언 담:고성토성 축조, 송학동고분 및 각 지역 무덤, 저수지 등)
그리고 해안 및 전답이 풍요로운 지역은 100~200호로 널리 산재되었음을 짐작케한다. 그 당시 소가야는 6가야 중 가장 영토가 좁았다.
삼국유사의 6가야 성립 당시 고성이 소가야로 역사에 표출된 것으로 적고 있으나, 유사(遺史)란 유문일사에 준한 것이지 정사(正史)로서의 가치성이 희박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성을 소가야로 불렀는가”에 관하여 몇 가지 가야저서들과 당시 고성의 역사적 사상(事像)을 총괄해 볼 때 필자는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6가야 연맹체제(만숙기 가야:미약함) 이전의 초기 가야시대에 고성의 중심마을(읍락) 이름이 소가야였다. 이 읍락이 역사의 흐름에 더욱 번창하여 고성군 전체를 대변하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근거 자료로써, 천관우 저 소가야연구서 4쪽:가야, 기타 읍락의 이름은 그 사용례에 따라 광의와 협의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이명동체(異名同體)인 것이다.」
그 시대에 우리 고성 뿐만 아니고 대부분의 가야 국명(國名)들이 중심 읍락을 기틀로 하여 부르던 이름임을 알아야 하겠다.
고성의 소가야는 4세기 초반에 일찍 발달된 것으로 보이며(청동기, 철기) 당시의 가야제국 등은 해안에서 농경문화의 발달로 관개수가 풍요로운 넓은 곳으로 이주했다. 이상에서 소가야는 교통과 군사요지인 점, 해양교역 및 농경문화발달, 자원의 풍요에 의한 철제농기구와 무기류의 양산(量産), 사계절이 분명한 따스한 해양 기후 등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구비하여 소가야 명칭으로 6가야 연맹체제에서 귀속하게 된 것이다.
소가야는 이웃의 사천(사물국), 삼천포(구라), 하동(대사:帶沙), 마산(骨浦國) 등을 제치고 당당히 독립된 가야국으로서 그들과 자웅을 겨눌 힘을 가졌다는 것은 고성인으로서 얼마나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가져야 할 고성의 명칭인가. 4, 5세기 변한 땅에는 무수한 나라가 철기와 농경, 해양문화를 바탕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힘을 배양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소가야의 후예로서 오늘은 물론, 미래에 영원토록 자랑스러운 소가야(小加耶)의 찬란한 역사의 발전상을 승화시키는데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고성은 고자미동국(2~3세기)→소가야(4~6세기)→고성(신라35대 경덕왕, 8세기)→철성(고려시대, 918~1392년까지)→고성군(갑오개혁, 1894년)으로 이어져 왔다.
소가야는 결코 작은 소국이 아니고 가야연맹체의 축으로 발전된 가야제국의 대들보 역할을 한 값진 이름임을 알고 이 땅에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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