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1. 이승만 대통령도 격찬
이승만 대통령 시절 고성군 대가면 어느 시골 마을에는 야단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그때 그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께서 전기 줄이 통과하는 곳에서 십 리나 넘는 거리에서 전기를 끌어 당겨 전기불을 켜게 하고 조화갑 옹으로 하여금 월남 고인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낼 대나무 모자를 제작케 한 일이 있었다.
(1) 대나무 모자 제작 비결
대바구니를 만들려면 칼로 대를 쪼개고 쪼개고 해서 그 가는 대나무 올을 엮어 각종 죽세공 제품을 제작한다. 한데 조화갑 옹은 특별한 장인으로 기술을 가졌다.
보통의 경우에 칼을 가지고 대나무를 쪼기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대나무 올이 직경 0.5㎜까지 되기까지 가공하는 데는 특수한 장치를 설치하고 그 공정을 거쳐야 한다.
조화갑 옹은 다른 보통 일반 죽세공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결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죽세공 가공인 들이 쪼갤 수 있는 한계까지 대를 쪼갠 다음에 철판에 7-8개의 크기가 다른 구멍을 낸다. 첫 구멍은 보통 대를 쪼개는 크기만큼을 뚫는다.
그 다음에는 조금 작게 그 다음 구멍은 조금 더 작게 뚫고 마지막 구멍은 직경이 0.5㎜ 되게 만든다. 가늘게 쪼갠 대나무 올을 7-8개의 다른 구멍을 통과시키면 0.5㎜ 정도의 대나무 올이 만들어 진다.
그런데 숙련공이 아닐 경우 대나무는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동안 끊어져 동강이 난다. 그러면 일급 대나무 모자를 만들기가 힘들다.
대를 직경 0.5㎜로 만들다 보면 굵은 명주실 모양같이 투명하고 깨끗하게 된다. 그 가는 대나무 올을 대바구니 만드는 과정과 같이 시작하여 머리가 들어갈 수 있는 굴을 만들고 또 날을 펴서 햇볕을 가리는 창을 만든다.
그리고 대바구니 마감하듯 마감하면 멋있는 남자 중절모자나 여자모자가 만들어 진다. 대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늦죽 이라는 질이 부드러운 종류가 있는가 하면 오죽이라는 질이 단단한 대가 있다.
대나무 모자를 만드는 데는 반드시 오죽을 사용해야 한다. 늦죽으로 만들면 해가 지날수록 변질된다.
반면 오죽으로 죽모를 만들면 세월이 흐를수록 중국인들이 놀음할 때 사용하는 마작 뒷면에 붙어있는 코끼리의 불-상아와 같이 노란색으로 변하며 반지르르 하게 된다. 40년 전에 만들어 놓은 대나무 모자를 보면 진기하기만 하다.
2002년 2월 6일자 시조사에서 발간한 「그의 곁에서」 책 서두 천연색 화보를 보면 1963년 진주 개천 예술제 때 전시한 장면이 나온다. 표면에서 광택이 나는 제품을 볼 수 있다. 저자 이화자는 한국 죽모제작소를 창설한 필자의 아내다. 필자는 1963년에 제작한 죽모를 가지고 있다.
이런 죽모 제작 비결을 발명했던 조화갑 옹은 환갑을 지난 나이인 1960년 초에 당뇨병에 걸렸다. 그때는 그 병을 조갈-병이라고 했으며 특별한 치료법도 몰랐다. 하루에 물을 몇 대접을 마시고는 자주 화장실에 들락거리셨다. 모습은 날로 초췌해 갔다. 그분을 아는 향토인들은 무명의 천재 장인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전수하지 못하고 죽는 것을 아쉬워만 했다.
(2) 대나무 모자 제작 비결을 전수 받을 청년이 나타났다.
그 즈음 부산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던 필자는 결핵이 재발하여 고향에 와서 휴학을 하고 있었다. 의협심인지 사업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필자는 그 기술을 전수받는 작업을 시작했다.
3학년 대학1학기 등록금을 가지고 겨울 방학을 마치고 부산으로 갔으나 부산위생병원장 엘릭이라는(Erich) 미국인 의사의 건강을 위해서는 일 년을 쉬어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가져갔던 등록금을 가지고 고향으로 되돌아와 휴학을 하게 되었다.
대성식당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계시던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전 김평수 과자점 이층건물을 빌려 죽모제작 기술 연수를 착수했다. 조화갑 옹에게 생활비를 대어주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 못하던 청년 3-4명을 고용해서 월급을 주면서 기술을 익히게 했다.
2. 도지사도 방문 격려
그때 고성군은 다음과 같은 표창장과 사업 장려금 27만원을 주었다.
표 창 장
고성읍 성내동 156번지
한국 죽모 제작소
대표 윤보현
제 213호 금일봉
“귀사는 특수 공예품을 우량 생산하므로 농촌 유휴 실업자를 구제하고 외화를 획득하며 향토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헌이 현저하므로 그 공로를 찬양하며 두서의 금품을 수여하고 표창함”
1963년 9월 10일
고성군수 행정사무관 박규철
시골에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특수 공예품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육군소장 경상남도 양찬우지사는 1963년 늦은 봄 어느 날 고성에 업무차 들렀던 길에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대모자 공장을 가보자고 해서 고성 행정당국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1963년 11월 20일자를 경상남도 지사 육군소장 양찬우씨는 제9283호로 다음과 같은 표창장을 보내왔다.
고성군 고성읍 동외동 윤보현
“귀하는 정부 상공 진흥책에 적극 호응하여 갖은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고 도내 기업체의 경영개선과 생산품의 품질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도민의 국산품 애용사상을 고취 진작하므로 본토 상공업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지대하므로 그 노고를 높이 찬양하여 이에 표창장을 드립니다.”
(1) 죽모 제작소 진주로 이전
한국죽모제작소는 육군 중령 이병문 시장 권유로 진주로 장소를 옮기며 업체명을 한국 공예사로 바꾸었다. 사장님의 도움으로 기업은행 자금도 융자 받을 수 있었다.
(2) 개천 예술제에서 국회의장상을 받아 무명의 인간문화재와 같은 조화갑 옹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로 1964년 제15회 개천예술제 특산물 전시회에서 전시된 죽모는 국회의장상을 받았다.
내 친구 아버지가 진주 상공회의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를 불렀다. “자네 죽모가 금번에 대통령상을 받을 만큼 뛰어났는데 진주 강남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정책적으로 그 회사를 키워야 하기에 대통령상을 받게 하도록 됐는데 자네가 양해해 주시겠나?”고 했다.
27살 세상 물정을 모를 뿐 아니라 물욕도 없는 총각 사장은 그 말에 동의했다. 나를 불러 나의 동의를 얻는 일에 오히려 고맙게 여겼다.
상 장
상명: 국회 의장상
한국공예사 윤보현
“위 자는 본회에서 개최한 제15회 개천예술제에 참가하여 심사 받은 성적이 우수하므로 사계 발전에 이바지 한 바 공로를 찬양하여 상장과 부상을 줌.
1964년 11월 10일
제15회 개천예술제 대회장 조영제
대회 위원장 박세제
(3) 미국 오레곤주 유진시장 부부께 선물
미국에 있는 유진시와 진주시는 산기슭 넓은 들판에 위치해 있는 환경이 비슷하여 자매 결연을 맺게 되었다. 이병문 시장께서 미국 유진시장에 드릴 선물을 한국공예사 측에 요청하므로 한 시민으로 기꺼이 선물을 희사한 일도 있었다.
(4) 전국 임산물 전시회에서 뛰어난 인기와 절찬
1964년 전국 임산물 가공품 전시회가 충청도 청주에서 개최되었다. 그곳에도 진주시청의 요청으로 죽모를 전시했다. 같은 죽세공산품을 수출하고 있는 한 업체가 전남 담양에 있었다.
그곳 죽세품 시장의 요청으로 한국공예사 사장인 필자는 일차 신혼여행을 마산 북면 온천에 갔다가 이차로 전남 담양으로 가게 되었는데 담양 죽세공 수출업체 사장이 그가 직면했던 난처한 일을 내게 말해주었다.
전국 임산물 가공 전시회에 관련부서 장관을 비롯한 요직 인사들이 모인 장소에서 전남지사께서는 담양 죽세공 수출업체 사장에게 화를 내셨다는 것이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진주에 있는 작은 업체가 전시한 죽모가 전남 담양 죽세품을 압도했다는 것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냐는 것이다. 진주산 죽모가 놀랄만한 제품으로 인정을 받았다.
(5) 21세기에 개발할 만한 신상품
1964년 개천예술제 때 전시한 모자 값은 개당 910원이었다. 그 당시 교회 전도사 월급이 3천원이었다. 모자 하나를 만드는데 분업을 하면 하나 내지 둘은 만들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과정을 거처 만들면 하루가 걸린다.
3일간의 노임을 받는다고 하면 모자 하나에 15만 내지 20만원의 고가품이 될 것이다. 향토 산업으로 다시 개발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제안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