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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더라도 어디에선가 농악소리가 들려오면 나도 모르게 그 쪽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고 장단의 흐름을 쫓아가는 것을 느낄 때면 피는 못 속이나 싶다.
그리고 쫓아가는 것 까지는 좋은데 어느새 장단의 흐름과 조화를 단순히 맞고 틀리고 2분법 잣대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문화 분야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가 ‘한심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 농악의 특색은 크게 상모위주의 빠르고 힘찬 경상도 농악, 장고 및 개인놀이 위주의 전라도농악, 대전이북의 섬세함과 기교를 위주로 하는 웃다리 농악 등으로 크게 나누고 있는데 이러한 지역적 분류는 농악의 작은 측면이고 진정한 멋은 아마도 농악의 정신적 측면일 것이다.
농악은 일제 치하 민족문화 말살의 의미축소인 농민들만의 음악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함께한 축제의 음악이며 항거의 몸짓이며 대동의 놀이판이 진정한 농악이라는 사실이다.
전쟁터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승전의 기운, 진군의 발맞춤이었으며, 일제치하 당시에는 민족의 혼을 깨우치는 지킴이 음악 이었고, 고된 농사일에는 노동의 힘듬을 나누는 나눔의 판이었다. 그 뿐이랴! 마을의 어려운 일을 함께 해결하는 협동의 음악, 화합의 놀이였다.
해방 이후에는 또 어떠했는가? 독재에 맞서 항거하는 민주의 소리였고, 어울림의 음악이었으며, 대동의 놀이 판 이었다.
또한 이 농악 소리가 나는 곳은 소위 말해 많이 배운 사람, 검은색 양복 입기를 좋아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며 말 많은 사람들이 오질 않았기에 누구나 주인인 평등의 판, 민의의 토론장이었다, 라는 사실이다.
우리 지역에서도 매년 농악경연대회란 이름으로 이러한 농악의 판을 열어 온지가 횟수로 벌써 10여 년이 지났고 지금은 소가야문화제 프로그램 중 지역민의 최고 관심거리이다.
아마도 이 판의 첫 출발계기는 잊혀져 가는 지역의 농악을 발굴하고 지역민의 화합에 이바지 하고자 하는 큰 뜻 이었을 것이다.
헌데 지금은 각 지역에서 오로지 1등을 목표로 하는 그야말로 대회를 위한 농악경연대회로 변질되고 있음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러다 보니 정신적인 면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기교적인 면과 빠르기, 각 지역의 화려한 것들만 한데 모아 종합 선물세트로 포장한 신 농악, 또한 단기적 사고에서 비롯된 1회성 농악 등이 판치고 있는 것이다.
매년 농악경연대회를 앞두고 각 면사무소와 체육회 등이 농악단을 구성하기 위해 머리를 싸잡아 맨다. 우선은 현수막을 걸지만 반 강제적으로 동원내지 모집을 하고 비교적 젊은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삼고초려도 불사한다.
이후에는 강사를 구하기 위한 노력이 남아있고 강사를 구하면 이제는 연습할 공간이다. 그리고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준비과정에 투입되는 예산인데 이는 지역 금융기관이나 체육회, 지역 업체, 행정기관 등이 마지막으로 머리를 싸잡아 맨다.
이쯤 되면 농악(農樂)이 마을의 즐거움이 아니라 농악(農惡)이 되어있다. 바로 각 면의 골칫거리요 준비하는 사람의 괴로움이요, 참여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매년 예산을 투자하고 연습을 해도 왜 발전이 없을까? 이는 단 한 가지 대회를 위한 농악, 보여주기 위한 농악, 짜 맞추기 농악, 냄비 농악을 하기 때문이다. 농악의 정신적인 지역민의 협동, 화합의 정신을 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이 농악을 지역민의 화합에 기여하는 대동의 판 중심에 울려 퍼지게 해 보자. 그러기 위해 우선 대회 보다는 축제의 판을 만들어 봄이 어떨까?
상장도 어울림상, 대동상, 화합상, 협동상등으로 하고 강제 참가보다는 자율 공연으로 유도하여 충분한 시간을 주어 놀이를 하게끔 하자. 올해 준비가 덜된 지역은 내년 공연을 위해 차근히 준비하는 시간도 주자. 꼭 1읍13개 면이 참여해야 하는가? 올해 7개 지역, 내년 7개 지역이면 어떤가?
올 해는 선거구도 바뀌어 지역민의 대표들이 얼굴 알리기에 더욱 분주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농악판에서 지역민과 함께 어울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농악農樂판, 살맛 나는 판, 즐거움의 판을 올해는 만들어 보자.
그리하여 농악판의 중심에 지역민의 어울림과 화합이 있게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