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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민족운동사’ 등 향토사료집 16권 펴내
생전의 소망 ‘향토역사박물관’ 건립
“향토는 민족의 혈맥이 고동치는 내 가족의 람이며, 조상의 얼이 이어져 오늘의 삶을 확인해 주는 안식처다.”
이 말은 故 조현식 선생이 고성의 향토사 연구에 일생을 바치면서 늘 부르짖었던 생전의 신념이며, 의지였다.
故 조현식 선생은 지난 96년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근 40여 년간을 고성향토사 연구에 몰두하면서 잠자고 있던 고성의 역사를 세상 밖으로 꺼집어 냈다.
생전에 그는 “민주화의 첫걸음이라 불리는 지방자치제가 원활히 수행되기 위해선 그 기초작업으로 일부 중앙집권층 중심의 왕조사관에서 탈피, 구체적인 삶의 토양 위에 선 지방서민들을 위주로 한 지방사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창해 왔다.
따라서 그는 해방 후 부산에서 국제신보사에 입사해 활동하던 10년간의 기자생활을 벗어 던지고 고향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고성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맨 먼저 고성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료수집에 정열을 쏟았다. 이 때부터 외로운 향토사학가의 고행이 시작된 셈이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는 향토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돈 안 되는 일’이며, 행정이나 지역민들로부터도 관심이나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어느 한 지식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나 연구 정도라만 비춰졌다.
이렇듯 주변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향토사 정립을 위해 고성전역은 물론 전국의 각 대학과 박물관 등을 찾아다니며 고성의 사료들을 수집해 나갔다.
그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과 경남향토사연구협의회 부회장 등을 역임, 한국의 역사를 바로 쓰는 데 앞장섰다.
경남도문화상을 비롯, 고성군민상 등을 수상한 그는 오로지 역사를 정립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의 역사관은 “모든 역사는 진실되게 기록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옛 문헌만을 토대로 향토사를 정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지역 주민을 직접 만나서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고성의 역사를 하나하나 기록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고성 14개 읍면,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그의 발길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하루에도 몇차례 사적지를 답사하고 연구에 몰두한 그는 비로소 79년 ‘고성민족운동사’ 발간을 시작으로 고성 향토사 정립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이후 그는 ‘임진란 고성 십오의사론’, ‘소가야의 맥에 대한 재고찰(연구논문)’, ‘왕조실록 고성사료 제1집’, ‘고성문화재 총서’, ‘고성읍면 연혁’, ‘향토수호와 당항포해전’, ‘옛 영역의 역사를 찾아’ 등 총 16권의 향토사료집을 발간하게 됐다.
현재 고성군에서 활용하고 있는 ‘고성군지’도 그의 노력의 결실이다.
이 많은 역사서를 만드는 데 그의 피나는 숨은 노력을 간과할 수 없다.
지금은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복사기 등 인쇄기술이 발달했으나 당시만 해도 겨우 발굴한 사료들을 일일이 친필로 베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 향토사료집을 모두 사비를 털어 발간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만약 조현식 선생이 자신의 이익이나 편안함을 추구했다면 지금의 고성향토사는 아직도 그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전에 그의 가장 큰 소망은 향토역사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소가야문화권의 유물을 한 데 모아 전시하고 교육함으로써 조상의 얼과 문화를 이어 받고 나아가 메마른 향토사회의 인정을 풍요롭게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
그의 이러한 역사관은 세인들보다 한 발 앞섰다.
다행히 고성군에서 2008년 소가야유물전시관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향토사 정립이 전부였습니다”
아들 조재상
“아버지께서는 향토사료집을 당신의 가족보다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故 조현식 선생의 장남 재상(62·수남리)씨는 아버지 곁에서 향토사 집필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의 남다른 고향사랑을 느껴왔다.
그러나 당시는 주변의 인정조차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그 작업에 대해 사실 불만도 많았었다.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향토사 연구에 집념을 불사르는 것과는 달리 자녀들에게는 유난히 엄격했던 아버지였기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제 그도 당시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가자 아버지의 그 큰 뜻을 차츰 이해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성 곳곳에서 아버지의 큰 족적을 느낄 때마다 존경심이 우러나온다고.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향토사연구에 이바지하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조씨.
그는 현재 고성 향토사연구를 위해 고생하는 많은 분들의 노고에 아버지를 대신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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