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성신문 | |
# 첫머리 들어가는 글 삼국사기는 1145년 고려 인종 23년에 당시에 문하시중이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책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이다. 근래에 ‘환단고기’라는 역사서가 출간되고 있으나 이의 진부 판단은 역사 학계의 학자들이 밝혀 낼 일이요. 일반 식자가 섣부른 의견을 밝힐 일이 아니다. 또 고려 25대 충열왕때 우리 고성의 큰 어른 이암선생의 저작이라 전하는 ‘단군세기’와 이암의 현손으로 ‘태백일사’를 지었다는 이맥은 모두 우리 고장 고성의 선인이시니 이분들의 사서가 전해졌다면 오늘의 우리나라 역사는 많이도 바뀌었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약 136년 후인 1281년에 승려, 일연이 편찬한 책으로 제1권 기이(記異)편에 고조선을 설정하여 석유환국(昔有桓國)으로 표기하고 일웅일호(一雄一虎)의 단군신화가 설정되니 이 또한 역사학자의 끝없는 연구가 요구된다. 본 강좌는 석학들의 연구 논문과 고견을 비평함이 목적이 아니요 새 학설을 주장함은 더더욱 아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사서인 삼국사기를 일독하면서 삼국의 힘의 균형이 어떻게 바뀌며 주변국인 대륙의 중국과 해양의 일본 반도의 삼국이 서로 어떤 견제와 화친을 하는지를 살펴보고 신라에서의 왕의 칭호, 가야의 외교 등 가장 우리와 가까운 2000여년 전의 역사를 산책하고자 한다.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본기 28권, 년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으로 분류하여 모두 50권으로 마련한 방대한 책이다. 당시의 고려는 대륙 몽고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왕의 칭호가 충(忠)을 써야 할만큼 약소한 나라였으나 역사의 기록으로 자주의 기상을 드높이려 한 고려의 옳 곧은 몸부림의 산물이다. 한자의 오자나 문맥의 해석에 다소 미비한 점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면서 향토 선후배 여러분의 함께 공부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三國史記 卷第一(삼국사기 권제일) 新羅本紀(신라본기) 始祖 赫居世 居西干(시조 혁거세 거서간)
始祖 姓 朴氏 諱 赫居世 前漢孝宣帝(시조 성 박씨 휘 혁거세 전한효선제) 五鳳元年 甲子 四月 丙辰 卽位 号居西干(오봉원년 갑자 사월 병진 즉위 호거서간) 時年十三, 國號 徐羅伐 先是 朝鮮(시년십삼, 국호 서라벌 선시 조선) 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유민 분거산곡지간 위육촌) 一曰 閼川楊山村 二曰 突山 高虛村(일왈 알천양산촌 이왈 돌산 고허촌) 三曰 角山 珍支村 四曰 茂山 大樹村(삼왈 각산 진지촌 사왈 무산 대수촌) 五曰 金山 加利村 六曰 明活山 高耶村(오왈 금산 가리촌 육왈 명활산 고야촌) 是爲 辰韓 六部 高虛村長 蘇伐公(시위 진한 육부 고허촌장 소벌공)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 跪而斯(망양산록 라정방림간 유마 궤이사) 則 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즉 왕관지 홀불견마 지유대란 부지) 有嬰아焉 則 收而養之 及年十余歲(유영아언 즉 수이양지 급년십여세)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至是立爲君焉(육부인이기생신이 추존지지시입위군언) 辰人 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진인 위고위박 이초대란여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고이박위성 거서간 진언왕)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며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갑자년(BC57) 4월 병진일에 즉위하다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이때 나이는 십삼세였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그 이전에는 조선의 유민이 이곳에 와서 산곡간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마을을 이루었다. 첫 번째는 알천양산촌이요 두 번째는 돌산 고허촌이요. 세 번째는 각산 진지촌이요. 네 번째는 무산 대수촌이요. 다섯 번째는 금산 가리촌이요. 여섯번째는 명활산 가리촌이니 이를 진한의 육부라 한다. 어느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라정 우물 곁의 수풀사이에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거늘 그곳으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있으므로 이를 깨뜨려 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십여세가 되자 육부의 사람들이 그 아이의 태어남을 신기하고 이상해 하였다. 모두 우러러 받들게 되었다. 이때에 임금으로 뽑아 세웠다. 진한의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이라 하였는데 혁거세가 태어난 알이 포주박과 같으므로 박을 성으로 하고 거서간은 진한 사람들의 말로 왕이란 뜻이다.
<혁거세 탄생설화. 신화> 五年 春正月 龍見於 閼英井 右脇誕生女아(오년 춘정월 용견어 알영정 우협탄생여아)児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之及長(노구견이이지 수양지 이정명지급장) 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유덕용 시조문지 납이위비 유현행) 能內輔 時人 謂二聖(능내보 시인위이성) 왕5년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나서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여아를 낳거늘 이를 본 늙은 노파가 이상히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알영이라 이름하였다. 자람에 덕성이 있고 용모가 뛰어났다. 시조가 듣고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능히 집안일을 잘 처리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두분의 성인이라 일컬었다. <시조비 탄생설화 신화>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乃還(팔년 왜인행병 욕범변 문시조유신덕내환) 왕8년 왜국이 병사로써 변방을 침범하려하자 시조가 신덕이 있음을 듣고 마침내 물러났다.
十七年 王巡撫 六部 妃閼英從焉 歡督農桑(십칠년 왕순무 육부 비알영종언 권독농상) 왕17년에 왕이 6부를 순행하고 왕비 알영도 따라 나섰다. 농사와 양장을 권하였다.
十九年 正月 卞韓以 國來降(십구년 정월 변한이 국내항) 19년 정월에 변한이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 金城 是歲 高句麗 始祖 東名立(이십일년 축경성 호왈 금성 시세 고구려 시조 동명입) 21년 서울의 성을 짓고 금성이라 하였다. 이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즉위하다(BC 37년)
三十年二月 遣瓠公 聘於馬韓 馬韓王(삼십년이월 견호공 빙어마한 마한왕) 讓瓠公曰辰卞 二韓 爲我屬國 此年不輸(양호공왈진변 이한 위아속국 차년불수) 職貢事大之 禮其若是乎 對曰我國自二聖…(직공사대지 예기약시호 대왈아국자이성)) 38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파견하여니 마한왕이 호공에게 진변은 우리의 속국으로 근래에는 공물도 보내지 아니 하니 사대의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왈 우리나라는 두성인이 계셔서…
瓠公者 未祥其族姓 本倭人…(호공자 미상기족성 본왜인) 호공이란 사람은 그성이 상세하지 않으니 본래 왜인으로…
四十年 百濟始祖 溫祚立(사십년 백제시조 온조입) 40년(BC38년) 백제 시조 온조가 나라를 세웠다. 53년 동옥저에서 사신이 오다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내가 남한에 성인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예물을 바친다고 하였다 61년 3월 거서간이 승하하다 사릉에 장시 지내다 운암사의 북쪽이다
二代 南海 次次雄立(이대 남해 차차웅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김대문운 방언위무야 세인이무사귀신)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상제사 고의경지 수칭존장자) 赫居世 嫡子也 身長大 性沆厚 多智略(혁거세 적자야 신장대 성항후 다지략) 母曰 英夫人 妃雲帝夫人(모왈 영부인 비운제부인) 五年 正月聞脫解之賢以 長女妻之(오년 정월문탈해지현이 장여처지)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 掠海辺民戶(십일년 왜인견병선백여 약해변민호) 發六部勸兵禦之 樂浪謂內虛來攻 金城 甚急(박육부권병어지 낙랑위내허내공 금성 심급) 2대 남해 차차웅이 즉위하다 김대문이 이르기를 차차웅은 방언으로 무당을 이르는 말로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사를 숭상하는 까닭에 이를 두렵게 여기고 공경하여 존장자로 칭한다 혁거세의 아들이다 신장이 크고 성품이 너그러우며 지략이 뛰어났다. 어머니는 알영 부인이고 아내는 운제 부인다. 왕5년 정월에 왕이 탈해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큰 딸을 시집보내었다 11년 왜국이 병선 100여척을 파견하여 해변의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은 6부에서 병사를 뽑아 이를 막았다. 이때 낙랑이 서라벌이 국내가 허약하다 하여 금성을 공격하니 심히 급하였다.
三代 儒理尼師今立 南海太子也(삼대 유리니사금입 남해태자야) 母雲帝夫人 妃曰 葛文王之女也 初南解夢(모운제부인 비왈 갈문왕지여야 초남해몽) 儒理當立 以大輔脫解 素有德望(유리당입 이대보탈해 소유덕망)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宝 非庸人所甚(추양기위 탈해왈 신기대보 비용인소심) 吾聞聖智人 多齒試以解座之(오문성지인 다치시이해좌지) 儒理齒多 乃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유리치다 내좌우봉입지 호의사금 고전여차) 金大問云 尼師今 方言也 謂齒理 昔南海將死(김대문운 니사금 방언야 위치리 석남해장사) 謂男儒理壻脫解曰 吾死後汝朴昔二姓(위남해유이서탈해왈 오사후여박석이성) 以 年長而嗣位焉 其後金姓亦與三姓(이 년장이사위언 기후김성역여삼성) 以 齒長 相嗣 故稱尼師今(이 치장 상사 고칭니사금)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오년 동십일월 왕순행국내) 九年 改六部之名 仍賜姓 李崔孫鄭(구년 개육부지명 내사성 이최손정) 裵薛又設官有十七等…(배설우설관유십칠등)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攻陷朶山城…(십삼년 추팔월 낙랑범북변공함내산성) 十四年 高句麗 王無恤 襲樂浪 滅之(십사년 고려국 왕무휼 습낙랑 멸지) 其國人 五千 來投 分居六部(기국인 오천 내투 분거육부) 삼대 유리왕이 즉위하다. 남해의 태자며 어머니는 운제 부인이다. 아내는 일지 갈문왕의 딸이다 처음에 남해가 죽자 유리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하나 대보 탈해가 덕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자리를 물러주려고 하였으나 탈해가 말하기를 신기대보(왕위)는 용열한 사람이 감당할 바 아닙니다. 내가 듣기로는 성스럽고 지혜 많은 사람은 이가 많다 하니 시험합시다 하여 시험하니 유리의 이가 많은지라 좌우에서 받들어 왕으로 모시었다. 니사금이라 이름하였다. 옛 전하는 말은 이와 같아 김대문이 이르기를 니사금은 방언이자 치리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 남해가 죽을 때에 아들 유리와 사위 탈해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후 너희들 박석 두 성씨는 연장자로써 임금 자리를 이어라 하였는데 그 뒤에 김씨가 또 일어났으므로 삼성이 치장자로서 서로 임금자리를 이었던 까닭에 니사금이라 칭하였다 5년 겨울 11월에 왕이 국내를 순행하고... 9년 육부의 명칭을 고치고 6부 촌장에게 성씨를 주니 이 최 손 정 배 설이며 또 고나등을 17등으로 하고.... 13년 가을 낙랑이 변경을 침범하여 내안성이 함락되었다 14년 고구려왕 무휼이(대무신왕) 낙양을 공격하여 멸하였다 그 나라 사람 5000여명이 와서 항복하므로 6부에 나누어 거주시켰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