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문화학교에서 ‘신나는 백악기시대의 공룡 탐방’이란 주제로 야외학습을 나갔다. 고성예총을 이끌고 있는 정영도 회장이 심혈을 기울이며 시행하고 있 국비사업 중 일환이다. 학습의 취지는 주 5일제 수업으로 주말에 방치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알차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우리 고성을 대상으로 하여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실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성의 상징물인 공룡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울러 소가야의 흔적은 물론이고, 독립유공자와 지역을 빛낸 인물을 찾아내어 아이들에게 자긍심을 높여줌으로써 소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하늘은 햇볕과 구름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었다. 작금에 돌아가는 거짓말 일색의 정치논쟁처럼 식상하지 않게, 서로를 배려해 준 덕에 무사히 학습을 끝낼 수 있었다. 이제 4월도 중순을 지나 녹엽은 손가락 두어 마디쯤 자라가고 있다. 연록을 스쳐온 바람은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코끝을 간질이고, 바다의 갯내를 풍기며 다시 수억년의 퇴적층을 만들어가고 있다.
공룡박물관에 도착하여 아이들은 두 명씩 짝이 되어 언덕을 오르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인원파악에 이어 박봉남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시대에 한반도에 공룡이 등장했다. 많은 학술논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 하일면 덕명리의 발자국으로 보아 공룡들의 집단 서식처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맨 먼저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공룡을 상징하는 큰 구조물은 실제 공룡의 크기로 제작되었다고 했다. 공룡구조물은 목을 빼고 먼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공룡이 저 멀리 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리움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 먼 옛날 섬은 육지가 갈라져서 섬이 되었다. 공룡의 애잔한 마음은 오늘도 가족을 그리며 먼 바다를 바라보고 섰다. 지금도 땅은 여전히 지층의 변화를 가져 오고 있단다. 어느 날 한반도 어디쯤엔가 틈이 생겨, 섬이 되어 둥둥 떠다니면 어찌될까? 나의 선천적인 지적 장애의 상상은 그쯤에서 끝났다. 아이들에게는 해설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무리를 이탈한 아이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 나는 더 이상 공룡해설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말이라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 나온 인파들 속에 아이들이 뒤섞여 동색은 일색이었다.
박물관을 나와 해안가로 향했다. 저만치 앞서 가던 진이가 울고 있었다. 진아! 왜 그래? “저 아이가 작다고 놀렸어요.” 같은 또래의 환이에게 놀림을 당한 모양이었다. 친구를 놀리면 안 된다는 내 말에 환이는 제 나름대로의 변명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녀석이 “도찐 개찐 거기가 거기”라는 코미디프로처럼 이제, 막 유치원 티를 벗어난 두 녀석의 키가 서로 나란하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으면 내년쯤에는 훌쩍 자랄 거라고. 이해시킬 시간도 없이 일렬횡대 속에 줄을 세웠다. 동병상련을 소통하려 했던 아이들에게 귀는 두 개요, 입은 하나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를 시켜야 할지… 우리말의 여러 가지 특성상 교착어니 담화적이니 한들, 남의 말은 끝까지 들어 보아야 한다는 것을, 코흘리개에 지나지 않는 1학년들이 알아듣기는 만무하다.
두어 시간을 지나 공룡발자국이 선명한 바닷가에 왔다. 마침 사리 물때라 멀리까지 물이 나 있었다. 아이들은 고동을 주워 내 손에 쥐어 주었다. 고것들이 아이들 마냥 내 손바닥을 살갑게 간질거렸다. 그 사이 환이와 진이는 태연하게 서로에게 물장난을 치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물끄러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먼 기억 하나가 썰물에 둥둥 떠밀려 왔다.
그러니까 20년 전쯤일 게다. 그해 여름방학 때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았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과학경시대회에 참가할 목적에서였다. 백과사전을 뒤져 공룡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룡의 걸음걸이를 상상하여 수도 없이 연습했다. 사진을 찍어 공룡발자국을 현상까지 했다. 그때는 모든 제반시설이 상당히 미비했다. 도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냥 한갓 오지 피서지에 불과한 해변이었다. 아들은 그렇게 해서 수억 년 전의 고성바닷가에 펼쳐진 공룡이야기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고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던지, 부상으로 한국과학기술처라는 글자와 이미지가 조각된 탁상시계를 받아 왔었다. 그때 난생 처음 서울을 다녀온 아들은 높은 빌딩에 어안이 막혀 이 다음에 꼭 서울 가서 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앵무새 같이 엄마 말만 쫒아오던 아이에게 변성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시류를 쫒아 허둥대던 에미보다 지 오라비를 더 따랐던 딸아이가 엄마 없이 우리끼리 서울 가면 뭘 먹고 살 거냐고 묻는 바람에, 돌아서서 웃게 했던 기억이 난다. 한 때는 그렇게 아이들의 꿈을 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사이 많은 걸 잃었고, 잃은 만큼 더 많은 걸 얻었다. 이제, 두 아이는 말이 씨가 되어, 에미는 언젠가는 돌아갈 노스텔지어로 남겨두고, 서울깍쟁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
아이들과 공룡발자국 위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잔디밭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햄버거와 음료수를 먹는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훗날 저들이 자라서 고향을 떠날지언정 고성바닷가의 공룡발자국은 잊지 않을 것이다. 지척의 거리이건만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무척이나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어 어머니를 대신 내려 보냈다고 했던가!” 고성박물관에 도착하니 최초의 뿔 달린 공룡 코리아케라톱스처럼 어머니들이 목을 빼고 자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