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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 영유권주장 30여년 동안 대마도를 연구해 오면서 수많은 역사기록서와 현지답사를 통하여 객관적 사료를 수록하였고 요즈음 발견된 지도 및 대마  | | 지의 기록이 있어 요지를 모아 본지에 연재하오니 많은 독자들이 애국적 차원에서 깊히 탐독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 개관(서문) 지금 대마도는 일본의 실효적 영토권 내에 있다. 그것은 그들의 무위(武威)에 위한 침탈행위의 결과이며, 결코 지리적 정치적 역사적 인종적 문화적 적법행위가 아니다. 일본은 그들의 왕 소잔명존(스사노)이 대마도는 한국의 섬이라고 했으며(일본서기에 많이나옴), 13세기 겸창시대의 무역 및 정치 대변기관인 대제부로부터 고려영토라고 공문을 보내왔고, 연이어 명치유신 이후 1870년에도 일본정부는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그들 스스로가 자인하였다(시말래탐서). 일제 35년간의 잔인한 식민정책에서 독립한지 67년, 늦은 감이 있지만 역사적 지정학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삼한시대 이래 우리의 호국강령인 대마도를 되찾는데 힘을 기울여야 될 것이다. 지금 그들은 우리의 심장부인 독도를 강탈하려고 발악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는 것. 차제에 독도 고수는 물론, 도래인의 혼이 담긴 대마도를 환수해야 한다. 해방 후 1948년 8월 16일과 1949년 1월 6일의 연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을 향하여 “대마도는 역사와 법적으로 명백히 우리 고유의 영토이기에 일본은 즉시 반환하라”고 했으며, 입법위원회에서도 완벽한 고증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고 단정한다면 우리의 선현이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이어오면서 밝힌 대마도 영유권은 물론 일본서기와 대마도지에서 한국영토로 밝혀진 엄연한 역사사실을 우리 스스로 포기하자는 말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1949년 1월 8일에 대마도 반환 내용물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는 옛적부터 우리땅이었다. 임난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으로 강점했을 때 결사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한 바 있고 지금도 의병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적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돌려 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대마도는 명백히 우리영토다. 섬 어디를 파 보아도 조선과 관련된 유물이 나온다. 곧 미점령군사령부(GHQ)에 반환을 요청 하겠다…그 후 대마도 반환은 6.25가 발발하면서 전쟁의 포성에 묻히고 말았지만 대마도 실지 회복운동은 계속할 것이다.) 본인이 연구해 본 결과 우리 선현이 써 둔 주옥같은 대마도 내용이 많이 발견되는바 이를 바탕으로 일본서기의 내용과 함께 대마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고증을 통해 밝히려 한다. 그리고 어떤 조건이건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의 군사적 합동 방어훈련 등은 중단을 요구한다. 우리가 한·미·일의 연합군사 판도의 구축은 곧 중·러·북한의 동맹판도로써 우리 스스로가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믿을 존재가 못된다. 아래의 역사 내용들은 우리 영토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먼저 대마도의 의미를 살펴본다. 첫째, 대마(對馬)란 마한과 서로 마주보며 마한과 한 쌍을 이루어 서로가 대화를 하던 섬이다. 즉, 태백일사 고구려편(16세기 중종 때 관찬서, 이맥 선생)에 ‘自古仇州 對馬島 馬韓分治之地, 本非倭人也居地’. 구주와 대마도, 일기도는 마한의 관경지에 소속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지금도 그곳에는 웅본, 웅습, 웅본신사와 고조선의 가림토문자가 많이 전하고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대마로 칭한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조선대륙의 마한과 대칭에서 온 것임을 입증하여 곧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위지동이전 끝부분의 한조(韓條)의 왜인조에 “한국영토의 남쪽 구야한국(拘邪韓國:伽倻)에서 남쪽바다를 건너면 대마국에 이른다. 그곳의 대관을 히고(卑拘)라 하고 부관을 히노모리(卑奴母離)라 했다는 대마국인데 이것이 최초의 대마 기록이 아니고, 일본신대의 왕 소잔명존이 대마도는 한향지도(韓鄕地島)요 하한지정(下韓之政)이라고 명명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그 내용인 즉, 대마도가 바로 옛부터 구야한국(금관가야)과 신라에 속했다는 것이 ̒삼국사기 신라실성왕편̓ ̒가락국기 좌지왕편̓ 및 ̒대동세보̓에 기록되어 있다(408년까지). 그 후 479년까지 고구려 호태왕의 임나연정에 복속되었다. 비문내용 중 대마도 연정(聯政10개국)을 형성한 내용인즉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ㅇㅇ 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水軍 討伐殘國: 고구려가 주어로 연결되어 왜가 신묘년에 들어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관병이 바다를 건너 임나가라(대마도)에 이르러 6성을 궤멸시키니 남은 것이 없었다. 왜(대마도왜와 대화왜, 구주왜)가 통합된 응신조가 거국으로 항복하니 이들은 신하로 따랐다(비문 및 태백일사 고구려편). 고구려는 실로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여 경기만 일대를 장악하여 중국, 일본과의 교류 및 백제의 중국 통로를 차단했고, 동쪽으로는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는 두만강 유역의 나진 선봉지역에 해상 허브 중심지역 구축 및 울진 삼척 포항 일대까지 진출하여 일본을 압박했다. 고구려를 뒤이어 발해의 해양세력이 동해를 장악하여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김부식 선생은 호태왕 비문을 보지 못하였기에(청일전쟁 때 일본장교가 발견) 신라 가락국의 영토를 연이은 고구려의 임나연정을 삼국사기에 기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15C세기 중종 때의 관찬서 태백일사 고구려편에 대마도는 마한의 관경지에서 고구려 호태왕의 임나연정이 수록되어 있다. 설치 목적은 복속시킨 백제, 신라, 가야, 대마도, 일본열도 간의 통로 통제와 대마도 일본열도 지역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셋째설은, 한국어의 해설이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 섬에서 유래된 말로 한국말의 두섬이 두시마에서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이다. 어쨌거나 이들 학설들은 대마가 우리 영토라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고 특히 마한의 분치국에서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등의 분국은 물론, 임나연정이라는 통합된 국가형태(401~479)가 존속하였고 연이어 백제 신라의 분국 통치로 보아 틀림없이 조선의 영토임이 증명된 셈이다. 1. 본론 (1) 대마도의 인문자연 대마도는 상․하도를 합하여 710㎢의 넓이를 가진 섬으로 본섬에 딸린 크고 작은 섬들이 98개, 92%가 산악지대로 되어 있다. 남북의 길이는 82㎞, 폭이 18㎞나 되어 거제도의 2배 크기며, 일정 때는 대마도 사람들이 하도의 ‘이즈하라’에 가는 것보다(2시간) 부산항(1시간)에 와서 일을 마치고 이웃마을에 마실 나온 것처럼 지내고 갔다. (나가도메 하사이의 저 ‘고대 일본과 대마도’) 대마도의 ‘비전승’과 부산 다대포와의 직선거리는 47㎞의 연안 섬이고 대마도와 일본 ‘박다항’까지는 142㎞ 지점에 위치한다. 대마 인구는 1996년 2월에 4만3천명이었으나 해마다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참고로 조선후기 1696년에는 3만2천725명이었다. ‘대마 자치 협의회의 백서’ 대마도의 산림은 풍부하며 특히 삼나무, 대나무 등의 경제성이 높은 식목사업으로 이들 나무들만 팔아도 도민의 100 예산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2) 대마도 고토(故土) 문제의 제기 대마도가 지금은 그들의 실효적인 영토권이 미치는 국경 섬이지만, 역사적, 원시적․경제적․지정학적, 정치적 영토권에서는 분명히 우리의 주권이 미쳤던 섬이다. 대마도 고토문제가 제기된 것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편찬 작업에서 간도문제와 함께 작업에 착수했다. 1945. 8. 15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의 입법위원으로 활약한 허영관 위원은 “대마도는 분명히 조선 땅이기 때문에 차제에 환속시켜야 한다.”고 주창했다. 뒤이어 이승만 대통령의 연이은 ̒대마도 반환 포고문̓은 그 당시 입법위원회의 고증자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안다. 또한 김성수 동아일보 사장은 많은 학자들과 접하고 1949년 3월에는 이문원 위원이 대마도를 태평양전쟁에 대한 배상으로 우리에게 되돌리려는 내용서의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그 당시 친일적 성향이 농후한 의원과 정부각료들의 미온적인 태도와 반대에 부딪혀 관철되지 못했다. ※그 때 패전한 일본에 대하여 우리가 당한 배상금조로 국회와 정부는 물론, 학자와 국민이 합세하여 점령지 연합군 사령부와 미국정부에 역사적 자료를 제출하고 지속적인 외교 교섭을 실행했더라면 대마도를 충분히 환수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스스로가 놓쳐버렸다. (3) 대마도는 우리의 주권이 미쳤던 섬이다 대마도는 한·일 간의 정치․경제․문화․무역의 창구로서 역할을 하였고 독자적위치에서 양국의 군사 정치적 충돌 속에서는 희생양으로 임해야 하는 불운의 위치를 점하였다. 다음은 일본 및 우리 정부에서 대마도가 한국영토임을 확고하게 규정짓는 몇 가지 항목을 추출해 본다. (4) 일본측의 내용 첫째, ̒일본서기̓에 소잔명존(스사노오) 왕이 대마도는 한향지도(韓鄕之島:鄕은곧國으로서 한국의 섬)이며 하한지정(下韓之政:한국의 정치가 미치던 섬)이라 했다. 참고 1. 소잔명존에 관한 기록은 단군3세 가륵 무신 10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여수기(余守己)에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참하였다. 마한의 관경지인 이 땅을 소시모리라 하고 소리가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으며 그 후손인 섬야노(陝野奴:소잔명존)라는 자가 오십맹신을 데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일본 왕이 되었다.(단군세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알치함) 참고 2. 일본서기(720년):신무왕(BC660년)에서 41대 지통왕까지(696년) 고사기(712년)와 함께 일본고대사 연구에 있어 단지 둘 밖에 없는 사료임.(사실의 결함으로 문제가 많음) 참고 3. 안함노, 원동중의 ̒삼성기 2편̓,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세조때의 관찬서̓ 등 일제 강점기인 1911년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운초 계연수 선생이 환단고기(桓檀古記)로 한 권의 책을 엮었다. 본 책은 신화 전설의 내용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한 민족의 기본이된 책이다. BC 1733년 7월 12일의 오성취류 내용은 서울대학교 천문관측팀의 박창범 박석재 박사를 비롯해 이미 세계적으로 증명된 바 우리 민족은 해와 달, 별을 숭상한 천신족으로써 과학적인문화(가림토문자와 정치 군사 경제구조)를 토대로한 홍익국가를 이룩했고, 치우천왕은 철갑부대로 중국을 정벌한 호쾌한 환단시대를 이룩한 생생한 역사의 기록이다. 환인천왕 때는 환국, 환웅 때는 배달국, 치우천왕 때엔 청구국, 단군 때는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물론 건국과정에 천신족의 신앙적 내용인 곰 토템이 있지만 어느 나라건 건국설화 과정이 있는 것으로 그래도 세계 각국과 특히 가필투성으로 쓰여진 일본서기에 비하면 무척 체계적이다. 특히 삼한 관경 본기편과 태백일사 고구려편 및 대진국 내용에는 왜에 대한 기록이 많아 우리 민족의 일본진출의 내용과 그 곳에서의 활약상을 소상히 적고 있다. (예) 예로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마한에서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사는 지역이 아니었고(우리도래인) 임나(대마도)가 나뉘어 4가라(가락국포함)가 되었다. 가라(加羅)란 그 지방의 중심이 되는 마을을 칭한다. 안타까운 일은 이같이 귀중한 역사의 사실을 기록한 본서를 위서(僞書) 취급을 하는 껍데기 사학자들이 우리의 대학강당에 실재한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다.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우리는 엄연히 기록에 있는 역사를 없애가는 나라다. 둘째, 일본 10대 숭신왕 65년(BC 33, 87년) 추 7월에 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치(蘇那葛叱知)를 보내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었다.(일본의 대외교섭기사로 처음이다.) 임나국은 축자국(筑紫國:복강현지방)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되 북은 험한 바다가 가로막고, 계림(경주)의 서남방 바다위에 있다는 것은 바로 대마도를 의미하며 그 때에 이 섬은 마한의 관경지에서 분국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BC 660년 일본 신무왕 때 황무지 갈대밭에서 새순이 돋아 오를 때 하늘의 창조신이 내려와 창끝의 내리는 물방울이 엉켜 큐슈 혼슈 시코쿠 훗카이도 및 일기도 대마도가 되었으니 대마도가 일본 땅이란 주장은 일본서기 자체가 왜곡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숭신왕 65년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임나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신대의 그들 주장과 연대차가 무려 600년이다. 여기서 말하는 임나국(목출도)은 바로 대마도다. 임나국은 기원전부터 마한계의 백제인이 이곳에 세웠고, 정치의 중심지인 계지(鷄知)가라가 금관가라(김해)의 분국으로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삼국사기, 가락국기, 이종기의 가락국의 영광). 금관국의 수로왕이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와의 국제결혼 등이 이를 증명함이다. 옛날 일본과 우리나라 거리를 삼천리로 보았다. 축자국에서 일기도까지를 일천리, 대마도까지 이천리, 부산 김해까지 삼천리로 보았다. 우리나라 세조 때의 관찬서인 태백일사 고구려편에 “임나국(任那國)은 대마도다”라고 증명했고, 광개토태왕 비문에서도 임나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일본서기의 임나국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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