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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거장 고성의 큰 별 김열규 선생 타계

한국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능한 지독한 책벌레 한국-한국인-한국문화 연구에 한평생
황수경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3년 10월 25일
ⓒ 고성신문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선생이 지난 22일 오전 10시 하일면 송천리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한 달 전 혈액암 진단을 받은 뒤 진주 경상대병
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아왔다.
평소 그의 인품과 작품세계를 흠모하고 추앙하던 고성지역 문인들은 “암 초기라서 곧 나으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니 마치 부모를 여읜 것처럼 허망하다”고 전했다.
고인은 국문학과 민속학을 동시에 연구하며 그것을 문학의 힘으로 승화시켜 한국학의 거장이라 불리며 학계의 존경을 받아왔다.


 


고인은 1932년 고성읍 덕선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에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29세에 교수가 된 고인은 서강대 국문학 교수, 하버드 옌칭연구소 객원교수를 지내는 등 교직에 있으면서 민속학과 한국문학을 아우르다 한국학으로 연구 지평을 넓혔다.
초기 민속학자들이 발굴한 자료에 대한 해석을 통해 한국학의 담론화 작업에 기여했다. 한국인들의 화, 유머, 욕 등 다양한 소재를 갖고 폭넓은 글쓰기를 시도했다.
강단에서 자연을 찬미했던 고인은 은퇴 이후 고성으로 귀향했다. 고인은 하일면 송천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꾸준히 학문연구와 집필을 하며 은퇴없는 삶을 살았다.
고성으로 귀향 후에는 행복, 공부, 독서를 열쇠말로 글을 써왔다.
인제대 교수·계명대 석좌교수·지리산고등학교 강사 등을 지내며 해마다 한 권 이상의 책을 집필하고 강연을 해왔다.


 


지난 3월 한 언론에 기고한 ‘미리 쓰는 부고’에서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는 그만큼, 미리 기획하고 노리고 벼르고 한 일들에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정열을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이 말을 실천하며 살았다.
이달 초까지 ‘김열규의 예맥(藝脈)’을 세계일보에 연재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한국인의 자서전’을 통해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언젠가 김열규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김열규가 있기까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약골’, ‘병골’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죠. 약을 밥보다 더 많이 먹고 자랄 정도였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운동을 하거나 뛰어노는 일이 어려워서 모두 다 운동하러 나가면 책상에 앉아서 혼자 책을 읽고는 했다. 학교 조회나 체조 시간에도 당번이랑 교실을 지키면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보니 ‘책벌레’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 시절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다”라며 책벌레가 김열규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소설책이고 동화책이고 원하는 책을 모조리 사서 읽었던 그는 “책에는 한 번도 굶주린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글을 쓰는 데 진짜 스승은 어머니였다고 술회했다.
“나의 어머니는 언문 제문을 가득 모아두고, 직접 짓는 솜씨를 뽐내셨다. 어머니의 고리짝 속에는 남들이 쓴 제문은 물론이거니와 직접 지으면서 그걸 꺼내 읽으시면서 우시는 것을 보고 내가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나도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했다.
여행을 좋아해 전국 팔도와 해외를 누비고 다녔던 그.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되는 지역의 사람들, 풍습,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민속학을 접하게 되었고, 민속학 자료들을 모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 덕분에 민요나 민담 공부도 하게 됐는데 어느새 문학과 민속학을 양수 겸장으로 하고 있더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저서로는 ‘한국민속과 문학 연구’, ‘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 ‘한국신화와 무속연구’, ‘한국문학형태론’ 등 70여 권이 넘는다.
몇 해전 창신대 이상옥 교수가 한 말이 떠 오른다.
“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교수님이 고성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고성으로서는 크나큰 행운이다. 살아생전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상욱(수필가) 여사와 아들 진엽(서울대 미학과 교수)·진황(현대고 교사)씨, 딸 소영(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미사는 25일 오전 9시 서강대 성당. (02)2072-2010


 


弔 詞


 


아, 죽음 그 순간까지 집필에 몰두했던 김열규 스승님!


 


생전에 그 흔한 문학박사니, 시인이니, 수필가니, 평론가니 하는 호칭보다는 학자가 갖는 본연의 호칭인 김교수님, 김열규 교수님이라고 불리길 좋아했던 김열규 님은 이제 제 곁을, 아니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가셨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혈연이나 학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만 당신께서 어릴적 떠난 고향이 좋아 무작정 낙향하신 이후 고성에서 이런저런 문학행사를 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스승으로 모셨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항암치료의 간병을 했으며 이승에서의 생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자택에서 시신을 편히 안치한 탓에 이 글을 씁니다.
김교수님이시여! 스승이시여! 행여 저의 아둔한 글로 당신께나 유족에게 심려를 끼치게 된다면 부디 용서해 주소서!
당신께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당대 최고의 국문학과 민속학의 권위자였습니다. 또한 문학평론가였습니다. 40여 년간 살았던 서울과 30여 년간 몸담았던 대학을 헌신짝 버리듯 홀연히 털고 일어나 어릴 때 자란 고향 땅으로 마치 어린 연어가 어미 연어 되어 돌아오듯 햇살 바르고 물빛 고운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자란만 기슭으로 돌아왔습니다. 대개 자수성가하여 일가를 이루거나 성공하면 고향과는 영영 담을 쌓고 사는데 정말 잘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 아니고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신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시고 난 후 어하지향인 편백한 남해안 갯가 고성 땅에 문화의 기적이 일기 시작합니다. 제가 주도했던 ‘고성문화사랑’을 시발로 각종 문화단체가 우후죽순 식으로 태동하게 된 것도 그 때였습니다.


 


당신의 그 깊이와 높이를 모르는 격조 높은 문학 강연을 들으려 인근 통영 거제 마산 창원 부산 진주 일대에서 초청이 빗발쳤고 문학도와 문화인들의 발길이 자택으로 끊이지 않았으며 당신 한 분으로 인해 비로소 문화의 불모지에서 벗어나 고성이 위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성 땅이 문화와 문학의 변방에서 중심축으로 진입한 것도 모두 다 당신 때문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특히 저를 끔찍이도 사랑하셨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었을까요? 당신의 부친은 좌익으로 월북하셨고 저의 부친은 보도연맹으로 6.25 때 경찰에 의해 학살 당하셨기에 그 아픔을 서로 공유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스승이시여! 물빛 고운 자란만으로 귀향해 20여 년 동안 50여 권의 책을 서술하고 난 2013년 늦여름의 어느 날 제게 평소와는 다른 음성으로 전화를 주었습니다. 암에 걸렸노라고, 경상대병원까지 일주일에 두어 번씩 간병을 좀 해 달라고, 자식들이 다 서울에 있어 할 사람이 없노라고. 그 말씀을 듣고 직장일이 바쁜 중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따랐습니다.
다행히 암(혈액)은 초기라서 진압이 되었으나 항암치료를 하는 그 과정이 힘든데도 악전고투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당신의 초인적인 의지에 감복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날(사망하기 하루 전)도 6번의 항암치료 중 4번째의 치료를 마치고 당신과 나는 기쁜 마음으로 경상대병원에서 삼천포로 향했습니다. 차창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항암치료를 다 마치면 같이 책을 한권 공동으로 집필하자며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이었습니다. 의사가 암은 제거되었고 치료만 잘 받으면 완치한다는 말을 들은 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삼천포에서 우리은행에도 들리고 탑마트에서 생필품을 당신이 직접 사서(사모님도 불편하여) 제 차에 싣고 기쁜 마음으로 댁에 모셔 드렸습니다. 새벽 6시에 하일면 자택을 출발하여 경상대병원에 치료받고 집에 온 것은 오전 11시 30분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날 저녁에 제게 전화로 “정형, 이제 몸이 많이 좋아졌소. 이 모든 게 정형 덕택이요.”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시간까지 PC앞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리며 ‘아흔 즈음에’란 글을 썼다니, 그것도 자그마치 71 페이지나! 몸이 완쾌한 후에 얼마든지 집필할 수 있는데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무엇 하려고 그렇게 무리를 했습니까? 참으로 답답합니다.
스승이시여! 당신의 생명과 바꾼 유고집이 될 ‘아흔 즈음에’란 초고를 지금 보고 있습니다. 보고 있노라니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작가는, 문학가는 모름지기 이처럼 온 몸으로 글을 써야 함을 제게 깨우쳐 주는 것같습니다. 스승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본받아 제 남은 생애 끝 날까지 무딘 펜을 갈고 또 갈겠습니다.
주여! 김열규 에라스무스(천주교 영세명)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소서!


 


/시인 정해룡

황수경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3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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