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積珍浦海戰과 地名 比定-①


류홍열(고성읍서외리) 기자 / 입력 : 2006년 05월 09일
ⓒ 고성신문

1. 들어 가면서<地名은 歷史다>


지명은 그 곳에 살았던 선인들의 생활의 자취로서 역사적 사회적 소산물이다. 지명은 무형의 문화유산으로서 고대사. 고대어. 고고학 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지명 연구는 문헌 자료나 유물 발굴이 부족한 소 가야사 즉 포상팔국의 맹주국인 고자국의 정체성을 찾는데 유력한 방법의 하나다.


 


본인은 평소 지명에 관심이 많았던 방외인의 한 사람으로서 향토지명사의 재조명과 학계에서 비정되지 못한 포상 팔국 의 보라국 지명, 그리고 소가야와 고자미동국 지명 어원에 대한 학계의 여러 가지 견해를 보면서 아직까지 정립되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금번 경남도에서 임진난 7년 전쟁 재현 프로젝트 추진에 관한 기사를 보고 우선 임진난 때 우리고장 거류면 신용리에서 일어난 적진포 해전에 관한 글을 싣고자 한다.


 


2. 赤珍浦 해전 槪要


임진난 1592년 5월 7 옥포 해전과 합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다음날인 58일 이른 아침 구산 고리량면(저도 부근)에 왜선이 머물러 있다는 기별을 듣고 곧 출발하였다.


 


수색결과 구산면 猪島를 지나 고성경계 赤珍浦에 왜의 대선. 중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왜군들이 포구만 마을집들을 분탕질한 뒤에 우리수군을 보고서는 달아났다. 배에 남아있던 왜 수군들은 싸우다가 우리수군에게 13척 모두 격파 당하고 말았다.


 


이 때 피신해 있던 적진포 근처의 주민 向化人 이 신동이라는 자가 구출되었다. 이 사람 말에 의하면 왜적들이 전 날 이 포구에 와서 마을에서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로 실어다가 배에 나누어 싣고서는 초 저녁에는 배에서 소를 잡아먹으며 새벽녘까지 주연을 베풀었는데 그 때 부르는 노래 가락이 우리나라 곡조였다고 말했다.


 


해전이 끝난 이날 선조 임금이 평안도로 피난가신 소식을 접한 이 충무공은 놀랍고 통분함을 감출 수 없었다.


 


3. 赤珍浦 해전지는 赤德도 당동도 아니다.


적진포 해전은 이 충무공 관련 저서나 논문에서 통영시 광도면 적덕 또는 고성군 거류면 당동으로 표기되어 그 동안 우리에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赤珍浦를 積珍浦로 그리고 거류면 신용리 옛 신리마을이 적진표 해전지임을 바로잡고 오류라는 것을 밝혀 보고자 한다.


 


(1) 적진포 해전에 관한 이 충무공 장계의 원문 발췌 내용 중에서 “저도를 지나 고성의 경계 적진포에 이르다.(過猪島 至固城 境赤珍浦) “오늘 이른 아침에 반은 배를 지키고 반수는 배에 내려 고성으로 향하였다. (今日早朝爲半守船半余下陸固城了指向)


이것은 적진포가 마산시 구산면 돝 섬을 지나 고성현()과 맞닿는 가까운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위치상으로 적덕마을이 될 수 없다


 


(2) 積珍鄕은 고성현에서 20리다. <在縣東二十里>라고 문헌에 나타난다. 그런데 적덕은 고성읍에서 14Km로 거리상으로 맞지 않다.


 


(3) 赤德과積珍지명의 음의 대응관계가 유사함으로 인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赤德, 지명의 어원은 마을 뒷산에 “붉은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유래 하였다고 본다.


 


붉은 바위 돌을 붉을 赤은 借訓하고 바위 돌은 德으로 借音 표기한 것이라 본다. 즉 돌 (돍>독>)의 고대어는 “돍”이라 보여 지며 '독'으로 차음한 것은 마을에 은혜가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積珍의 보배()珍은 “돌”을 차훈 한 것으로 村里를 뜻한다.(후술)


 


(4) 적진포 해전 장계 발췌문 중에서 “적진포 근처에 사는 向化人 이 신동이란자”. (同赤珍蒲近處居向化人李信同稱號者)


 


향화인 이란 귀화인을 말하며 이 신동이란 자는 향화왜인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지금도 신용리 하원마을과 화당리 중간 지점에 “애앳등” 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 애앳등이란 향화왜인들이 옛날 살았던 마을이란 뜻일 것이다. '고성향토지명사'에 의하면 왜인들이 이주하여 수년 동안 살다가 겨울에는 추운 곳이라 마을을 형성하지 못하고 애통(원통)하게 해방 (1945)(일제강점기 때) 이전에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런 흔적을 보아도 적덕이나 당동이 될 수 없다.


 


(5) 赤珍浦와 積珍浦의 赤과 積이 잘못 표기된 점은 그 때(당시) 장계를 올릴 때 있을 수 있는 착오이다.


<계속>

류홍열(고성읍서외리) 기자 / 입력 : 2006년 05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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