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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지배 하의 고성

김화홍 논설위원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2년 04월 16일
ⓒ 고성신문

본지 칼럼장을 빌어 6세기 고성이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백제본기’의 역사 내용을 기술하며 군민의

새로운 역사인식은 물론, 고성군지의 내용을 보완해야 하겠다.
첫째, 백제의 남한지역 진출내용을 보면 계체(繼體:일본 왕) 25년(531년) 대사(帶沙:하동)에 진출하여 이미 왜와 통교하기에 편리한 항만을 확보한 백제는 522년부터 531년 사이에 동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남한(南韓)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아라(安羅:함안)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대사, 아라 사이의 넓은 영토를 군사적으로 장악한 사실과 점령지의 통치자인 군령(郡領), 성주(城主)의 설치(10여년간의 세금 및 인력동원) 후에 주민들의 상당한 반항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 계체 8년(514년) 3월조에 의하면 반파국(伴跛國:고령)에 의하여 백제 방면의 방어선으로 설정되었던 자탄(子呑:거창) 대사, 만계(滿溪:고성 상리면) 중에서, 흠명(欽明) 2년(541년) 4월 이후에 백제조정에 참여한 가야제국은 자탄뿐이었다. 연이어 흠명 5년 11월조에도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된다. 이것은 이미, 대사와 만계가 백제의 영토에 편입되었으므로 백제 조정에 사신을 파견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백제는 점령지에 군령과 성주를 두어 주민들의 거센 항의를 무마시킨 후 10여년이 되면 백제조정의 직속령으로 편입시켰다. 대사와 아라 사이의 사천, 진주, 고성지역이 백제가 군령, 성주를 두었다는 남한지역이다. 이것은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경로에 비추어서도, 또 가야제국에서 보아도 이 지역이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남한(下韓)이라 불렀다.
여기서 군령, 성주의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면, 괄지지(括地志)에 백제는 오방이 있었는데 이는 중국의 도독과 같으며, 오방은 각각 10~6개의 군을 관할했다. 방(方)에는 방령이 있어 달솔이, 군에는 군장있어 은솔이 임명되었다. 군현에는 도사(道使)가 있어 이를 성주라 하였다. 이 사료를 통해 성주는 군 아래에 속한 현의 수령임을 알 수 있다.
531년까지는 사천, 진주, 고성지역이 군사적으로는 지배되었지만 행정적인 지배는 초기단계는 각 지역의 전통적 수장층에 위임되었을 가능성이다.(심리적 미봉책)



둘째,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의 부름에 541년(흠명2년)과 541년(5년 11월) 두 번이나 구차(久差, 固城)의 지배자 한기(旱岐)가 백제에 갔다. 목적은 일본부에 신및 임나국의 집사가 와서 일본왕의 칙언을 받들어 듣고, 같이 임나(任那)의 일을 모의하라는 것이다. 환언하면 신라에 의해 임나(금관가야)가 멸망한 것에 대해 다시 막강한 신라와 싸워 임나를 수복하라는 일왕의 명에 따라 백제성왕이 부른 것이다.
“빨리 임나를 세우라”는 계책에 길비신(吉備臣)과 임나의 한기들이 “임나국을 세우는 것은 오직 대왕에 달려 있습니다. 다같이 주상하여 성왕의 칙을 들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흠명왕과 성왕의 임나수복칙(勅)은 바로 임나일본부(4~6세기) 복원 문제이지만, 사실은 임본부란 일본기내지방의 둔창이나, 백제 군영의 지휘소에 준하지 않았다고 증명되고 있다.



이상 두 번이나 백제 성왕의 부름에 고성의 최고 지도자가 응했다는 것은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544년에 참가한 자들을 보면, 일본의 길비신, 아라의 하한기대불손, 가라(고령) 상수위, 자타(거창)의 한기, 고성의 한기 등으로 보아 백제의 조정에 편입된 것이 아니고 백제국의 군령이나 성주의 지배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아라와 고성은 행정적으로 562년 이후에도 가야연맹체 중에 가장 오래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본기’와 ‘일본서기’쪽의 내용이 일치된다.



셋째, 송학1호고분 중 8기의 현실벽에 붉은 채색의 벽화가 있다는 것은 나는 백제 고분의 영향으로 본다. 발굴팀과 일부 참관자는 해양의 영향 운운하지만 6세기 소가야의 해외무역상을 재조명해 보더라도 멀리 남방과의 교역 영향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것으로 안다. 물론 가야와 신라의 고분에는 천마도를 제외하고는 무덤에 벽화가 없다. 그러나 백제는 공주 송산리고분 등에서 현실에 변화가 있다. 이것은 6세기 중국 남조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기록에 있고, 백제의 지배속에 고성이 존재했다는 역사기록을 볼 때 무려 40여년간의 백제문화속에서 고성의 지배내용을 강화하기 위해 한기 무덤의 현실에 채색으로 벽화를 칠한 것으로 보아진다.(백제지배의 영향)



반대로 평양대학 김석형 교수의 ‘고대한일관계사’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의 부름으로 두 차례 가야 한기와 임나일본부신이 임나부흥에 임하여 막강한 신라와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538년에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백제가 체제정비도 하기전에 두 차례(541, 544년)에 걸쳐 임나부흥을 위해 신라와의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규정짓고 여기에 나오는 임나는 일본기내지방에 둔 둔창지역(군사창고)에 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김석형 교수의 반증을 그대로 받아 들여도, 고성의 일부지역(상리, 만계)은 백제조정에 편입된 역사의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상 세가지와 비판 내용을 종합해 볼 때, 1. 상리지역을 중심한 고성의 일부지역은 백제 40여년간 예속됨.(522~562년 이후)
2. 고성(구차)은 백제의 지배자 군령과 성주에 의한 지배속에 고성의 한기가 정치적으로는 그대로 존속된 시기는 21년이다.(541~562년 이후)
3. 송학1호고분의 8기채색벽화는 백제의 영향으로 보임.
※ 참고문헌 : 1. ‘백제본기’ 2. 이근우 저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 3. 김석형 저 ‘고대 한일관계사’ 4. ‘송학고분발굴서’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2년 0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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