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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 김학렬, 대한민국 경제의 산파였다

경제개발5개년계획 입안, 포항종합제철 건설, 경제주역
최민화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6월 27일
ⓒ 고성신문

박정희 대통령 제1의 경제참모, 1972년 췌장암으로 별세


 


1972년 3월 21일 오전.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종합평가회가 진행되고 있었

. 회의 중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된 메모지 한 장. 박 전 대통령이 홀연히 사라졌다. 경호원들이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1층 화장실에서 대성통곡하는 박 대통령의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암살당할 뻔한 현장에서도 찬찬히 다음 말을 이은 냉철한 대통령의 눈물은 김학렬 부총리의 부음에 터져 나왔다.


 


# 철의 사나이 박정희를 울린 김학렬



철의 사나이를 울린 김학렬 부총리는 1923년, 고성 수남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몸이 불편해 자그마한 가게를 꾸리며 지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일지언정 자식 공부에 돈을 아낄 수 없었던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을 게다. 고성초등학교, 그때의 공립고성보명학교를 거쳐 김학렬 부총리는 부산으로 유학을 떠났고, 부산상업고등학교와 원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일본의 중앙대학교를 졸업했다.



전형적인 학자의 길을 걷던 김학렬 부총리는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교)에 합격한 후 경제관료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1952년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과 오하이오주의 에크론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김학렬 부총리는 재무부 관료에서 고공행진을 거듭하며 1963년 경제기획원 차관, 1966년에는 재무부 장관, 1969년 6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발탁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박 전 대통령이 육군 소장이던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다. 고시 합격 후 재무부 관리과장으로 있을 때, 박정희 육군 소장이 김 부총리를 찾아와 물었다. “무능한 장면 정권을 대신해 경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찌 보면 김학렬 부총리의 능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김학렬 부총리는 본격적인 제3공화국 경제 주역으로 활약한다. 김 부총리는 특유의 배짱과 소신으로 성장주도형 경제정책을 밀어붙였고, 그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버티고 있었다.



# 이걸 세상이 백년 뒤에나 알아줄까



경제발전과 함께 교육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꼽았던 김학렬 부총리는 모교인 고성초등학교에 강당을 건립하고, 축구대회를 열어 고성군 청소년들의 건강을 관리했다. 그런 그에게 써머스쿨과 장학사업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바닷가의 지극히 평범한 소읍이었던 고성을 한우비육으로 고향경제를 한 단계 끌어올렸고, 여름이면 대독리와 수남리가 온통 물바다가 되던 원인인 대독천에 제방을 쌓아 군민의 피해를 막았다.



김학렬 부총리의 손에 꼽을 수도 없는 업적들 중에서도 항상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다투는 것이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포항종합제철 건설’, ‘경부고속도로 개통’이다. 서울과 부산을 횡단하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됐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그 시절 필리핀보다, 북한보다도 살기가 고달팠던 대한민국을 신흥경제강국으로 끌어올리는 초석이 됐다. 이어진 포항종합제철의 건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과 맞물려 국가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이 모든 경제발전의 뒤에는 김학렬 부총리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뒤에는 수많은 경제참모들이 있었다. 막대한 영향을 끼친 비중에 비해 김학렬 부총리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발전의 디딤돌을 닦아놓은 1972년 1월, 퇴임한지 3개월 만에  생을 달리해 알려질 겨를이 없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너무 열심히 뛴 탓일까. 1972년, 췌장암 선고를 받았을 때 김학렬 부총리는 부인 김옥남 여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는 포철 때문에 병이 들었다. 이걸 세상이 한 백년 뒤에나 알아줄까.”


 


# 김학렬은 박정희의 과외선생이었다



김학렬 부총리를 이야기할 때 박정희 대통령과의 숱한 일화들은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학렬 부총리의 ‘학’자를 따서 일본어로 ‘쓰루’라고 불렀단다. 이름자뿐만 아니라 학처럼 고고하고, 독설을 아끼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 탓에도 그렇게 불렸을 게다.



박 대통령은 가끔 늦은 밤에 서울 혜화동 김학렬 부총리의 집을 방문했다. 둘은 대통령과 부총리임과 동시에 술친구이기도 했고, 국가의 경제를 고민하는 동지이기도 했기에 허물없이 방문했을 터. 취기가 오르면 박 대통령의 애창곡인 ‘황성옛터’가 틀림없이 터져 나왔다. 김학렬 부총리의 부인인 김옥남 여사는 박 대통령의 늦은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배포가 꽤 큰 여자였던 김옥남 여사는 국가원수인 박 대통령에게 눈을 흘겼더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단다.



“여보시오. 자네 바깥양반은 내 과외선생이야. 내가 경제를 배우러 과외선생 집에 오는데 뭐가 잘못 됐어.”
김학렬 부총리는 공직관이 투철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다.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어느날 김 부총리가 김옥남 여사에게 갑자기 100만원을 급하게 준비해서 봉투에 나눠 넣어 달라 했다. 모두가 배를 곯던 시절이었다. 경제기획원 부하직원들이 점심시간이면 밥을 먹지 않고 바둑을 두거나, 중앙청으로 산책을 나가곤 하더란다. 눈 여겨 보니 점심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점심을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100만원은 부하직원들의 점심값으로 지급됐다.



김학렬 부총리의 화장실 참을 ‘忍’자 일화도 유명하다. 워낙 칼날 같은 성미에 참는 일도 좀처럼 없었고, 불의를 보면 더더욱 그랬다. 본인도 그걸 알았던지 김학렬 부총리의 집 화장실에는 참을 忍자가 붙어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독설가로 유명했던 김 부총리의 부하직원이 결재를 받으러 들어왔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 얼마나 살벌하게 독설을 퍼부었던지 이 부하직원은 적잖이 당황해 방문인 줄 알고 캐비닛 문을 벌컥 열었단다.
김옥남 여사는 후에 김학렬 부총리의 독설과 관련된 일화들을 놓고 ‘참 불 같은 양반’이라고 회상하곤 했다.


 


# 그를 기억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다



김학렬 부총리의 숱한 업적은 오랜 세월 묻혀 있었다. 후손들도 이미 고성을 떠난 데다 사람의 기억은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다.
김옥남 여사가 생존해 있을 당시만 해도 학림유치원이 운영돼 김학렬 부총리의 뜻을 이어갔지만, 운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은 학림유치원은 학원도 됐다가, 지금은 교회가 됐다.
김학렬 부총리의 동상은 예전 학림유치원 교사 옆에 있다. 한 쪽 옆에는 책을 끼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빛나는 미래를 가리키고 있다. 교육으로 이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던 생전의 뜻일 게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푸른빛을 띈 녹으로 뒤덮였다. 받침대는 화강암 덩어리 사이로 녹물이 흘러나와 흉하기 짝이 없다. 녹이 슨 채로 키 큰 나무들에 가려져 한눈에 찾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도했고, 고향 고성을 위해 잠시도 쉬지 않은 이의 동상이라기엔 초라하기까지 하다.
그의 업적을 기억하는 이들이 김학렬 부총리의 동상을 이전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고, 지난 6일 드디어 김학렬 부총리 동상이전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참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쉽지가 않다. 추진위가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김학렬 부총리의 모교인 고성초등학교로 옮기자니 이 큰 인물을 모교 후배들만 보고 지내는 것이 안타깝고, 또 남산공원으로 옮기자니 그 절차나 부지도 문제다.
학림유치원의 기억을 가진 이들 그리고 김학렬 부총리의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야 동상의 존재만으로도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성군민들 중 20대, 30대의 젊은이들에게 김학렬 부총리에 대해 물어본다면 누가 제대로 대답할까.
김학렬 부총리는 분명 고향 고성을 위해 애썼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바친 이다. 그를 기억하고, 그를 후세에 알리는 것은 김학렬 부총리가 닦아놓은 기반 위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쉰도 되기 전인 49세의 일기로 췌장암이라는 몹쓸 병을 만나 생을 마감해야 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입안으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산파역할을 했고, 포항제철의 건설로 국내 중화학공업의 주역이었던 김학렬 부총리가 세상을 뜨자 자신이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눈도 깜빡하지 않았던 철의 사나이 박정희 대통령은 대성통곡을 하며 이렇게 말했단다. “한평생 나라를 위해 일하다 죽었어. 내가 임자를 죽였어.”



 












▲ 제목을 넣으세요


▣ 류성갑 옹이 회고하는 김학렬 부총리


 


그 분은 고성군민의 별이었고 영웅이었습니다


류성갑(86·고성읍 서외리) 옹은 오랜 세월을 교단에 섰다. 그는 김학렬 부총리의 어린 시절과 고성을 위해 펼친 여러 사업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류 옹는 어린 시절 수남리의 김 부총리 이웃에 살았고, 고성초등학교 29회 졸업생으로, 김 부총리와의 인연이 깊다.



김학렬 부총리는 고성초등학교를 25회로 졸업하고 유학을 떠났다.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경제관료로 손에 꼽기도 힘든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류성갑 옹은 수십 년 교단에 섰다가 퇴임하기까지 김학렬 부총리가 펴는 사업을 보조해온 이다.



“그 분은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이 끊어진 적이 없었고, 60년대 청소년 축구대회를 개최하면서는 고향의 후배들을 위해 축구화를 보내준 분이지요. 고향을 위해서도 대독천 제방 정리며 한우비육, 국도 14호선 개통 등 많은 업적들을 이뤄놓은 분입니다.”



그가 기억하는 김학렬 부총리는 교육과 경제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사람이었다. 장마철이면 언제나 물난리로 몸살을 앓던 수남리 일대를 대독천의 제방 정비로 홍수에서 구했고, 마산과 고성을 잇는 국도 14호선이 다른 시군보다 훨씬 일찍 개통된 것도 김학렬 부총리의 열정 덕분이었다. 거류면 용산에는 한우생산특별지역을 만들어 농가소득 증대에 심혈을 기울였고, 구 공설운동장의 시설공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어린이들의 교육이 전무하다시피 하던 시절, 8년간 여름방학이면 예전 학림유치원 건물 지하에서 ‘뉴화랑’이라는 써머스쿨을 운영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아들들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친구들을 강사로초청해 내려오곤 했다.



모교인 고성초등학교는 물론 군내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장학금을 전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대회 참가가 어려웠던 삼산중학교와 개천중학교 등 면단위의 중학교에는 축구대회 출전을 위해 사비를 털어 축구화를 보내기도 했다.



“참으로 강직한 분이셨습니다. 불의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모교사랑이 대단했지요. 그래서 군내 초등학교로는 처음으로 모교인 고성초등학교에 강당도 건립했습니다. 웬만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지요.”



그런 김학렬 부총리의 뜻을 이어 부인 김옥남 여사는 1974년 학림유치원을 개원했다. 인재육성이야 말로 경제발전의 초석이라는 김학렬 부총리의 믿음을 이어받은 것이다. 학림유치원은 경영상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80년대 중반 결국 문을 닫았지만 나이 지긋한 군민들은 아직도 김학렬 부총리의 열정을 기억한다.



“그런 어른이 계셨기 때문에 우리 고성이 이만큼의 결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은 고성군민의 별이었고 영웅이었습니다.”                            


 

최민화기자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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