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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 서비 최우순 선생 순절 100년
진정한 선비는 나라의 불운에 바른 처신을 하는 이라 했다. 선비는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다. 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 적과 싸우는 것 역시 선비의 덕목 중 하나였다.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의 서비 최우순 선생이 그런 ‘진정한 선비’였다. 올해는 서비 선생이 일본에 나라를 뺏김을 통탄해 자결한 지 100년 되는 해다.
#편안히 있을 곳이 없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학동마을로 들어서는 어귀에는 어지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비가 있다. 서비 최우순 선생의 순의비다. 순의비를 넘어 돌담길을 지나면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 도곡산록에서 서비정을 만날 수 있다. 1832년 학림리 학동마을에서 농암 최백진 선생의 아들로 태어난 서비(西扉) 최우순(崔宇淳) 선생은 7세에 이미 한시를 지어 주변이들의 경탄을 자아낸 당대 최고의 유학자다. 어린 시절, 송휘순(宋彙淳)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부모의 명으로 과거시험을 보면서 현실의 모순과 마주치게 됐다. 그 후로는 과거에 마음을 버린 채 오로지 독서를 통한 수신에 모든 힘을 쏟았다.
서비 선생의 행적은 범인들과 달랐다. 1895년 서비 선생은 국권 회복을 위해 이진묵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주장으로 추대됐다가 일을 진행하던 중 진압군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진묵을 비롯해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잡혔을 때 서비 선생은 병중이었다. 피신할 것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서비 선생은 “구차하게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니 편안히 앉아 기다리겠다” 했다. 이내 토벌대가 선생의 집에 들이닥쳤다. 토벌대장을 막아선 것은 서비 선생의 덕망이었다. 토벌대장은 선생의 덕망에 체포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자 민영환과 조병세 등 충신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에 시를 지어 통곡했다. 서비 선생은 청사(晴沙)였던 본래의 호 대신 서쪽 사립문이라는 뜻의 서비를 호로 삼고, 동쪽의 일본을 향한 문을 봉쇄하고 서쪽으로 다시 문을 내 두 번 다시 왜놈 땅을 보지 않겠노라 하며 시를 지었다.
‘지금 천지가 바뀌어 종묘사직은 망하고, 머리와 발이 뒤바뀌어 삼천리 강토에 편안히 있을 곳이 없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이에 호를 바꿔 서비로 부르니 지금부터는 서쪽에서 기거하며 서쪽에서 늙어 서쪽에서 죽을 것이다.’
1910년, 결국 나라는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일제는 민초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두려워해 덕망 있는 이들을 회유하려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내렸다. 선비들은 은사금을 받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서비 선생도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관에서 계속 연락이 왔고, 선생은 불의의 돈은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급기야 면사무소에서는 헌병을 보내 강제로 돈을 가져다 안기기에 이르렀다. 서비 선생은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는 법인데 나이 80 먹은 노인을 밤에 잡아갈 수 없지 않느냐”하며 날이 밝거든 가자고 청했다. 그날 밤 서비 선생은 홀로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선비로서 당당히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이었다. 1911년 신해년 3월 19일의 일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아무리 고래등 같고 궁궐 같은 집이라 해도 금세 퇴락하고 만다. 서비정은 이제 퇴락했다. 숭의회를 조직하고 향사를 지냈을 그리고 철마다 온갖 꽃들이 피고 졌을 마당에는 취나물만 무성하다. 안으로 향하는 숭의문 앞의 노송만 쓸쓸하다.
서비 최우순 선생의 지조와 고결함은 이제 연구하는 이나 문중 정도에서나 알까, 역사 속으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향사도 멈춘 지 오래다. 향사를 지내기 위한 사람이 없는 탓일 게다.
역사가 없이는 후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광자원도 좋고, 경제 발전도 좋지만 100년 전의 귀한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드는 안타까운 역사의 자락이다.
#세세지장도(世世之庄土)를 누릴 곳, 학동
학동은 전국의 반촌과는 다르다. 나라에 충성하고 공을 세워 내려 받은 봉토가 아니라 입향조(入鄕祖)와 후손들의 단단한 의지로 일군 반촌이다. 17세기 후반, 전주최씨 시조인 문성공 최아(崔阿)의 16세손이자 임란창의공신 의민공 최균(崔均)의 현손 최형태가 하늘에서 학이 내려와 마을에 알을 품고 있는 꿈을 꾸었다. 날이 밝자 그길로 꿈에서 본 그 곳엘 가보니 과연 명당이라, 세세지장도(世世之庄土)를 누릴 수 있는 곳이라 믿고 학이 알을 품는 모양이라 해서 학동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인 반촌과는 달리 바다와 접한 학동은 그때 황무지였다. 가솔들을 거느리고 함안에서 학동에 정착한 이들은 가세를 늘리고, 밭을 일구고, 물길을 내 논을 만들고, 하천둑을 쌓는 등 점차 마을의 형세를 만들었다. 학동은 낙남정맥 이남에서는 하동 금남면 한재와 함께 반촌으로 알려졌고,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전국 최대의 전주최씨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학동마을의 돌담길은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58호다. 동리에서 난 납작한 돌들이 켜켜이 세월과 함께 쌓인 돌담길을 따라 걷노라면 600년 전의 학동마을을 걷는 착각 속으로 빠진다. 지점돌을 놓고, 강담을 쌓은 다음 흙으로 토담을 쌓고, 개석으로 마무리했다. 마르지 않으면 높이 올릴 수가 없는 토담이다.
그들의 담장은 끈기와 인내 그리고 구휼이 군데군데 묻어난다. 돌담을 따라가다 보면 수챗구멍 외에도 군데군데 사람 키 높이에 맞춘 구멍이 뚫려있다. 배곯는 이가 많던 시절, 굶주린 나그네에게 무엇이든 먹을거리를 나눠주기 위한 구멍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2대를 이어 국회의원을 지낸 최갑환, 최재구 부자의 집도 학동마을에 있다. 천성이 순하고 사람이 따르는 이들이라 그런지 집도 오밀조밀 사색하기 좋은 분위기다. 남부지역 전형적인 부자 저택의 형을 갖춘 최영덕 씨의 고가는 경상남도문화재 자료 178호로 지정돼있다. 안채와 안사랑채, 곡간채, 사랑채가 ㅁ자로 배치돼있고, 남성들과 손님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성의 공간인 안채는 내외차단벽으로 구분돼있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전통목조건물인 사랑채 학림헌은 당시 관청에서 너무 멀어 민초들이 관청엘 드나들기 힘들던 시절, 지방의 토호 세력에게 행정권을 주고, 향소역할을 했던 곳이다. 때문에 학림헌의 천정은 당시 관청의 그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지대(축담)으로 내려서면 손을 씻기 위한 세면대가 있다. 후원에 있는 井자 모양을 한 대리석 우물은 뚜껑에 난 구멍 세 개가 각각 하늘과 땅과 사람을 뜻한다. 당시의 석공이 얼마나 멋을 부렸을까, 싶은 우물이다.
마을에 터를 잡아 정착한 전주최씨 학동문중 종갓집은 11대 종손이 300년의 종사를 이어온 고택이다. 마을의 중심부이자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종가는 대지만도 3천306㎡에 달한다.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토담으로 쌓은 창고, 텃밭, 학동마을의 특징인 돌축대와 축대 위 토담, 돌덮개 지붕의 닭장, 가묘 등등. 종가는 그 고고한 기풍이 학동마을에서 정점을 이룬다. 학동은 마을 전체가 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를 경제적 목적으로 관광에만 이용하려는 것이 안타깝다. 체험을 위한 공간과 휴식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다면 학동마을 돌담길 자체만으로도 찾는 이들이 많아지겠지만, 자칫하다 역사와 선조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마을이 돈벌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급해지기까지 한다.
#덕망과 학력을 함께 갖춘 후세 육성, 육영재
본래 반촌이 양반들의 마을이라 그런지, 교육열 또한 다른 마을과 남달랐다. 1723년, 마을이 번창하면서 후세교육을 목적으로 초가삼간의 육영재(育英齎)가 세워졌다. 초가로 시작된 육영재는 1845년, 앞면 6칸, 옆면 2칸 건물로 확장 건립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저수지 공사 때문에 표석만 남기고 사라진 천도연은 요즘으로 야외학습, 경연대회와 같은 것들을 개최한 곳이다. 대문 앞은 아름드리들이 늘어서 흡사 공원과 같다. 이 아름드리들은 천도연까지 이어져 장관을 이뤘다. 육영재 중수기에 ‘경치를 즐기기 위해 정원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학습의 도장으로 세운 것이다’라 했으니, 천도연은 곧 육영재의 본채와 이어지는 한 건물이라는 말이었다.
신교육 이전에 한창 육영재가 번창했던 시절에는 학림리뿐만 아니라 하일면 전역, 하이 사곡, 상리 등 인근지역에서까지 100여명의 학동들이 모여들었다. 육영재는 요즘으로 치자면 유치원부터 대학 수준의 학문을 닦을 수 있었던 종합교육기관이자 교육재단이었다.
육영재에서 수학한 이들 중 특히 학동문중은 대대로 학문을 깨치게 돼 20명 이상의 시문집이 전해지고 있다. 육영재는 한국전쟁 당시 하일초등학교가 전소되는 바람에 5년간 하일초등학교의 교사 대신 교육공간으로 사용된 것을 마지막으로 교육기관으로써의 소임을 마쳤다.
전주최씨 후손들은 후세의 학문 연구와 교육을 위한 육영재의 역할을 되살리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다. 군에서는 육영재와 학동마을을 잇는 선빗길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선비의 고고한 인품이 녹아들 선빗길은 600년 전,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 함안에서 고성까지 긴 걸음을 했을 전주최씨 문중의 고단한 여정을 기억하게 해줄 것이다. 학동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대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100년 전의 우국충절이 그대로 살아있고, 600년 전의 선조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마을. 전국에 몇 남지 않은 반촌인 학동마을은 이제 타인들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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