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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0주년을 맞이하는 고성신문, 그리고 그 역할

이진만 논설위원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6월 10일
ⓒ 고성신문

지금도 골목 한쪽에 가끔 보이는 다방(茶房)은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아스라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청춘 남녀의 데이트 장소로, 혹은 예술가들의 담소(

笑)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던 곳이기도 하다.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지금도 그 풍경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이칼라에 중절모를 쓴 지역 어른들이 다방 한 구석에 모여 앉아, 담배 연기를 날리며 탁자 위에 비치된 신문을 읽고 있던 모습을, 그리고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마시며 물 건너 먼 나라 이야기에서부터 시시콜콜한 동네 이야기까지 나누던 풍경을……. 젊은 청춘들에게는 사랑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나이든 어른들에게는 삶의 흔적을 공유하는 사소한 이야기에서부터 신문에 던져진 화두(話頭)로 조국과 민족을 걱정하는 주제까지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물론 남정네들만 사랑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인네들이 즐겨 사용한 사랑방은 미장원이었다. 이곳에서 동네 여인네들이 펌 모자를 둘러쓴 채 그들만의 은밀한 이야기에서부터 가족과 이웃의 사소한 이야기까지 서로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이렇게 예전의 다방과 미장원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이들의 주 화제(話題)는 동네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어디에 새 길이 났고, 누구 집에 길흉사가 있었다는 둥, 동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 모습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는 일회성이었고 말 그대로 사랑방 담소였다. 당시는 개인적인 삶보다 국가적인 이념이 더욱 중요시되던 때라서 지역의 이야기가 일간지에 실리는 일이 드물었다. 중앙이나 지방 일간지의 관심사는 어지러운 정국(政局)이나 급변하는 시사(時事)였지 지역 소시민의 작은 삶은 기삿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군사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1991년 초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가 부활되면서 민초의 삶이 부각되었다. 주민들의 관심사는 이제 전국의 정보나 세계의 이슈보다는 우리 동네의 이야기로 쏠렸다. 사람들은 동네의 일은 모르면서 남의 동네일과 남의 나라 사람이 한 말을 두고 갑론을박(甲論乙駁)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에 공감했다. 당연히 이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사랑방 좌담을 광장으로 끌어내어 공론화할 필요가 생겼고 그 역할을 지역 언론에 맡겼다. 지방자치의 실현과 함께 지역 신문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고성신문’은 김종래 씨를 비롯한 뜻있는 분들이 모여 ‘지방자치와 지역 언론의 중요성을 주창’하며 1991년 7월 26일 창간호를 발행했다. 그러나 지역 신문의 발걸음은 생소한 길이었기에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앙과 지방의 일간지가 득시글하고 무가지(無價紙)가 판치던 때라서 일간지에 비해 크기도 작고 매수도 적은 지역 신문이 주민들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아예 광고 전단지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사람까지 있었다. 결국 고성신문은 경영 악화로 1995년 10월에 휴간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1997년 11월 28일 김상수 씨를 발행인으로 ‘새고성신문’이 창간되었고, 그 해 12월 20일에는 김상진 씨가 ‘고성신문’을 복간하였다. 이후 1998년 새고성신문과 고성신문이 통합되면서 ‘고성신문’이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러나 다시 고성신문은 경영이 악화되었고, 이에 지역 신문 하나 살리지 못하는 지역이 지방자치의 역량이 있냐는 지역민의 부끄러움과 함께 군민주(君民株)로 변환하자는 여론까지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발행인 김상수 씨의 와병까지 겹쳐 ‘고성신문’이 다시 휴간에 들어갈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2001년 말에 지역 언론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던 김성규 씨가 자산을 털어 고성신문을 인수하였고, 1991년 창간 당시의 고성신문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올해 20주년을 맞게 되었다. 정말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 지금의 고성신문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창간부터 현재까지 고성신문 굴곡(屈曲)의 역사를 옆에서 지켜본 필자의 입장으로는 현 김성규 발행인의 집념을 정말 높이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거의 아사(餓死) 직전의 고성신문을 사비(私費)를 들여 살린 것은 물론이고, 그 신문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김성규 씨의 지역 언론에 대한 정열 때문이었다. 사주(會主)라는 신분을 버리고 신문이 나오는 날 새벽이면 직접 가가호호 배달을 하였고, 전국의 향우회를 돌아다니며 신문 구독을 독려하였다. 그 노력 결과 지금은 매주 6천부의 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지역 신문의 한계를 넘어 전국 곳곳에 고성신문이 배포되고 있다.



그 외에도 고성신문 20년 역사 속에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고성신문을 키워온 기자들과, 봉사 정신으로 지역의 소식을 가져다주는 주부기자들과 학생기자들, 그리고 지역 발전을 위한 화두(話頭)를 던져준 논설위원들의 역할이 녹아 있다. 다들 고성신문을 지금 이 자리까지 끌고 온 원동력의 역할을 잘 해내었다.



그러나 가장 큰 공로자는 20년간을 지근(至近)하며 지켜준 지역의 주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고성신문이 비틀거릴 때는 엄하게 꾸짖어 바로 서게 하고, 바로 설 때는 박수로 격려해 주었다. 경영 악화로 휴간을 했을 때는 아쉬워하고 어떤 이는 거금을 한꺼번에 내어 평생 독자로 등록을 해 주었다. 그러다가도 신문이 잘못된 길을 간다고 생각하면 냉철하게 꾸짖고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하였다. 애증(愛憎)을 가지고 고성신문을 키워온 지역의 주민들이야말로 고성신문의 주인들이며 20년 생일상을 받을 사람들이다. 더구나 2010년 3월에는 개인 사업이었던 고성신문이 법인으로 바뀌었으니, 이제 고성신문은 개인 사주(社主)의 신문이 아닌 법적으로도 고성 주민 모두의 것이 되었다.



오는 7월 26일이면 다방이나 미장원 안에서의 담소를 지역민의 공론으로 이끌어 신문을 발간한 지 꼭 20년째 되는 날이다. ‘20년’이란 숫자가 주는 의미 때문인지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다.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러기에 창간 20주년 기념행사는 험난한 길을 헤치며 살아남았다는 만족감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주민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신문이 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기본적인 일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고, 주민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신문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가진 자들만이 공유하는 신문이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의 그늘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등불이 되어 주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소금이 되어야 하며, 지역 발전을 위해 디딤돌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고성신문 창간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고성신문 만세, 고성 사람들 만만세!


 

고성신문 기자 / kn-kosung@newsn.com입력 : 2011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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