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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만세 함성 고성 곳곳서 울려 퍼져

고성읍 덕선리 박진완 선생 집에서 거사 모임
황수경기자 기자 / 입력 : 2006년 03월 10일
ⓒ 고성신문

고성에서는 7번 독립만세 외쳐 애국정신 심어


3 30일 구만면 허재기 주동… 구만, 배둔 태극기 물결


 


고성지역에서는 모두 7번의 기미(己未)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고성읍에서 3차례, 구만면과 회화면에서 1차례 상리면, 영오면, 대가면에서 각각 1차례씩 독립만세의 물결이 일었다.


 


이는 타 지역에 못지 않은 끈질긴 민족투쟁의 정신이 고성지역에 만연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충절의 고장 고성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산기록들의 고증을 찾아 후세에 남겨 고성지역 선조들의 애국애족정신을 일깨워야 할 것이다.


 


고성읍의 첫 의거는 1919년 3월 15 밤 고성읍 덕선리 선동마을에 있는 철성의숙의 박진완 선생의 집에서 거사가 논의됐다.


 


이때 진주사람 이주현이 의혈단의 동지인 배만두 선생과 이상은, 기상욱 선생을 은밀히 불러 들였다. 이들은 곧 거사에 착수, 배만두는 학생 동원, 이상은은 기독교인 동원, 김상욱은 농민과 일반군민 동원을 각각 맡기로 했다.


 


이렇게 책임을 분담한 후 제1차 의거는 3 17일에 결행하기로 의논했다. 불과 2일밖에 남지 않은 짧은 준비기간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거사날 아침 뜻하지 않게 일본 헌병이 배만두 선생 집을 덮쳐 그를 잡아 감으로써 좌절됐다.


 


배만두 선생이 풀려 나지 못하고 7일간의 구류를 살게 됨으로써 제1차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민족의거는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났다.


 


3 22(음력 2 21) 고성장날을 택해 이상은, 김상욱, 김진만, 김형정, 이상희, 김갑순, 임도근, 이형수, 문상범 등이 농민과 일반시민, 천도교인, 기독교인 등에게 거사에 참가토록 권유하며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당시 이 거사에 안태원, 김정도, 서동조 등이 적극 가담, 고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찾아 다니면서 거사에 같이 일어서 줄 것을 권유했다.


 


안태원, 김정도, 서동조는 드디어 3 22일 학생 200여명을 이끌고 일반시민 종교인들과 같이 뭉쳐서 고성읍 쌀 장터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본 군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올랐고 학생들이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잇달아 외치면서 시가행진 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일본헌병과 경찰이 급히 달려와서 총검으로 학생들을 위협하고 주도인사들을 붙잡아 가자 시위대열은 부득이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거사가 도중 무산되는 것을 지켜본 군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4 1일 장날보다 규모가 더 크고 완강하고 발전된 의거를 일으켰다.


 


이날 오후 4 30분경 의거민들은 쌀장터에 줄을 이어 모여들게 되었다.


삽시간에 수백 명의 군중이 운집하게 되자 김진만, 김형정, 문상범, 정충열 등이 감추어 가져 나온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백의 군중이 뒤따르며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쳤다.


 


이에 놀란 일본헌병들은 사천일군헌병분견대의 지원군과 재향군인 소방대원까지 총 동원해 군중들에게 총검을 휘두르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다. 심지어 일본상인들까지 엽총을 들고 나와 제지에 나섰다.


 


이를 보고 격분한 문상범은 일본헌병에게 덤벼들었다가 총검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게 됐다. 문상범이 어시장 안에 있는 샘물터를 피로 물들이고 쓰러지자 곧 포박돼 일본헌병에게 끌려갔다.


 


사태가 위태롭게 되자 군중은 끓어 오르는 울분을 참으며 해산했다.


이 의거로 8명의 주도인사 김진만, 김형정, 김상욱, 문상범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4개월~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서주환은 1주일간에 걸쳐 고문을 당하고 석방됐으나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진만 6개월의 복역 후 출옥하자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노역장인 일본 화태탄광에 끌려가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한 채 차디찬 원수의 땅에 묻힌 넋이 되고 말았다.


 


배만두는 중국으로 망명, 운남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정규과정을 이수한 후 조선보병대에 배속되어 있다가 신흥군관학교 교관으로 전속되어 후진들의 군사교육을 가르쳤다.


 


그후 배만두는 이범석 장군 휘하의 독립군에서 항일투쟁에 활약하다 국내의 투쟁사명을 띠고 함북청진으로 입국했다.


 


그는 해방 후에는 고성에서 매년 거행하던 3.1절 기념행사 때 생존자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구만면, 회화면에서는 4 1일의 고성읍 의거보다 앞선 3 20일에 일어났다.


 


고종황제 인산에 갔다가 서울의 3.1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지니고 온 최정철과 함께 허재기, 최정원, 최정주, 최락희, 최낙종, 이종홍, 이종석, 이정수, 문태용, 우태선, 김해제, 구남서 등의 주역들이 구만면 사람들을 모아 망국의 분노를 터뜨리며 독립을 부르짖고 만세를 외쳤다.


 


그 여세를 몰아 회화면 배둔장터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때 배둔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갑록, 서찬실, 김동기 등이 구만면 주역들과 함께 수천의 군중이 종일토록 만세를 불렀다. 이 거사로 7명이 붙잡혀 옥살이를 당했다. 최정원은 옥중에서 순국했다.


 


대가면 송계리 의거는 이진동이 주동이 되어 1919년 3월 2 오후 2시경 송계리 송계의숙 사설 강습소에서 나팔을 불어서 약 400여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본헌병과 대가면 주재소 경찰관이 출동, 총검으로 탄압하게 되자 해산했다.


 


상리면 오산의거는 3 18일 오산리에서는 한일동이 진주의 독립만세 의거에 참가하고 나서 마을 청년들과 의논하여 동지를 규합, 한기원, 진택성, 진정성, 진윤성, 진구성, 진갑성, 진인성, 진익성 등이 주동이 되었다.


 


이들은 큰 한지에 '독립만세'라 쓴 깃발을 들고 오산 삼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도중 상리주재소에 파견되어 있던 일본헌병들이 달려 와서 총칼로 위협하자 해산했다.


 


영오면 의거는 4 3일 면소재지에서 수백의 군중이 모여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 마을주민 등에 의해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옥천사 승려의거가 있다.


옥천사에는 호국사상이 투철했던 신화수, 한봉진 두 승려는 변상태, 이주현, 곽인협, 이조협, 순우협 등 국내에서 손꼽히고 있던 애국지사들과 시승들이 자주 만나 나라일을 의논할 때 이들에게 숙식제공은 물론 위험을 무릅쓰고 밀사를 자처했다.


 


신화수 1921년 승복을 벗어 던지고 농사꾼으로 변복, 영오면 오동리 서정윤의 도움을 받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의 거사를 도모했다. 그러나 일본 앞잡이인 친구에 의해 붙잡혀 손톱발톱을 빼이는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제2차 독립만세 기도사건이라 했으며, 옥천사의 신화수와 통도사의 박치오 등이 주동했다.         

황수경기자 기자 / 입력 : 2006년 0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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