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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일제강점 초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그 중에서도 남쪽에서는 탈놀음, 광대놀이가 태동했다. 민초들의 설움을 풍자하고 고된 그들의 삶에 웃음과 희망 을 주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휘영청한 보름달 아래서 놀던 그 놀음이 그의 손에서 고성의 ‘문화’로 재탄생됐다.
영현면에서 태어난 박진학 선생은 일본 공사판에서 짐을 지고 건물을 올리던 인부이기도 했고, 전매소 직원이기도 했으며, 농군이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땅을 일구며 그 뿌리를 찾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민초들의 문화와 오락은 낯익은 것이었다. 원체 흥을 즐기는 이였다. 동네의 놀음판이란 놀음판은 빠지지 않고 즐겼다. 그러니 고성오광대의 명맥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광대를 기억하는 이들이 조금씩 사라져가던 시절이다. 고성오광대가 있는 줄도 모르던 시절이다. 통영엘 갔다가 오광대 놀음판을 보고 그만 혼을 뺏겨 버렸다. 그의 귀에 풍문이 들리기를, 고성에도 오광대가 있다 했다. 그와 동지들은 지금처럼 번듯한 전수회관도 없던 시절에 그의 집에서 오광대를 살리자, 하는데 뜻을 모았다. 박진학 선생은 그때부터 고성군내 경로당마다 쫓아다녔다. 자신이 기억하는 이전의 춤사위들을 찾아내고, 익히고, 정리하고, 재구성했다.
그 즈음 고성오광대의 윤곽이 잡혔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도 꾸려졌다. 최응두, 허종복, 이금수 선생 등이 오광대의 태동을 함께한 이들이다. 최응두 선생을 회장으로 내세우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미처 가정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어딘가에서 놀음이 벌어진다 하면 열 일 제쳐놓고 달려가기가 부지기수였다. 아내 차종아 여사의 무한한 인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내는 남편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그 시절의 전형적인 여성이었다.
현실은 노력만큼 달디 단 열매를 선물하지는 않았다. 박진학 선생과 그의 동지들이 오광대를 살리기 위해 피땀을 흘리던 당시, 오광대는 그저 천한 놀이패일 뿐이었고, 광대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회가 왔다.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참가하기 전, 누군가는 고성오광대를 잘 보이기 위해 손을 부빌 생각도 했다. 박 선생은 단호했다. “우리가 이뤄놓은 것은 그렇게 가볍지 않다. 자신있다.”
결과는 섭섭했다. 대통령상은 부산 동래야유에 돌아갔고, 고성오광대는 국무총리상에 그쳤다. 처녀 출전에 국무총리상이면 못한 것도 아니건만, 박진학 선생은 욕심이 났다. 그해를 지나 이듬해 같은 대회에서 드디어 대통령상을 따내고야 말았다. 두 번의 수상은 고성사람들이 오광대를 보는 인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당당히 고성에 발을 내딛었다. 군수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그들을 환영했다. 마을엘 들어서니 가히 잔치분위기였다. 대회에 출전하느라 마을을 나설 적에는 잘 다녀오라 인사조차 없던 이들이 며칠 만에 이렇게 달라지다니, 그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더 이상 천한 광대패라고 놀림 받을 일도 없었다. 1964년, 고성오광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1971년에는 초창기 고성오광대를 이끈 선생들이 줄줄이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로 등록됐다. 박진학 선생은 제51호로 지정됐다. 번듯한 회관도 없이 집 툇마루에서 장구와 북만 두드리며 오광대를 발전시키자, 하던 그 시절로부터 몇 년 지나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박진학 선생은 생전에 고성오광대 전수회관을 염원했다. 오광대를 배우기 위해 서울에서도 찾아오고 미국에서도 찾아오는데, 그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박 선생은 그곳이 어디든 노구를 이끌고 그들 앞에 나서 고성오광대만이 가진 흥과 혼을 전하곤 했다. 1990년, 노환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박진학 선생의 오광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박진학 선생이 생을 달리 한 후, 오광대는 그가 닦아놓은 발판을 딛고 일어섰다. 그가 그렇게 염원했던 전수회관도 생겼고, 그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오광대의 얼을 잇는 전수자들도 많다. 오광대의 살림도 불어났다. 박진학 선생의 노력이 지금에서야 열매를 맺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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