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어느 가을날 때마침 가을비마저 스산하게 내리는 오후 서울 용산의 국립박물관 버스 주차장에서는 3대의 관광버스가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 니다. 버스 앞유리에 ‘영천중학교 영현분교 현장학습’이라는 안내 표지가 붙은 차에 인솔교사의 안내를 받아 버스에 올랐습니다. “얘들아! 총동창회 회장님이시다. 너희들을 보러 오셨단다. 많은 책도 선물하셨단다.” 인솔교사의 소개가 있자 갑작스런 이방인의 출현에 어리둥절하던 아이들은 박수로 환대했고 똘망똘망한 눈망울들은 회장이라는 사람의 입을 주시했습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후배 여러분...” 그러나 여기까지 말하고는 그만 목이 메이고 말았습니다. 인사말도 제대로 못하고 “책을 많이 보라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엉뚱한 한 마디만 남기고 서둘러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렇게 버스는 출발하고 떠나가는 버스의 뒷모습을 비를 맞으며 눈으로 배웅한 것이 내가 사랑하는 모교 영현중학교 우리 후배들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눈물 바다가 되었다는 그들의 마지막 졸업식에 참석 안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로 남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영현중학교 마지막 수학 여행단이었습니다. 다음 해 2008년 2월 영현중학교는 공식적으로 폐교가 되고 영천중학교와 합병되고 말았습니다. 영현중학교가 번성하던 시절에는 영천중학교는 영현중학교 영천분교이었지요. 그러다 모교는 영천중학교 영현 분교로 전락했다가 영천중학교로 합병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4천여 영현중학교 출신 동문들은 하루아침에 학교를 잃은 ‘폐교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1955년 영현중학교는 금태산 아래 영천강변에 당시 수리 중이던 옥천사에서 옮겨온 목재를 이용, 목조건물을 짓고 학교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영현, 대가, 개천, 영오, 금곡 등 지역 청년들의 배움 중심점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너나 할 것 없이 어렵던 시절, 영현중학교는 지역 청년들이 매달렸던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습니다. 이 학교로 인해 숱한 청년들이 꿈과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입니다.
학교 건물은 초라했으나 배움에 대한 열망만은 뜨거웠습니다. 거센 겨울 바람을 맞으며 두세 시간을 걸어 등교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밀린 학비 때문에 집으로 쫓겨 가면서도 다음 날이면 고개를 푹 숙인 채 교문을 들어서던 친구들이 눈에 선합니다. 중학교를 마지막으로 곧장 사회로 나가야 하는 여자 친구들이 졸업식장에서 흘리던 그 아픈 눈물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자식들을 중학교만은 마치게 하겠다며 한 줌 두 줌 보리쌀을 아끼던 수많은 어머니들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을 고스란히 담았던 우리 학교가 바로 영현중학교였습니다. 그 학교가 60여 년의 역사를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동문들과 지역민들이 학교를 지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학교가 문을 닫은지 3년여! 건물은 눈에 띄게 쇠락하고 있습니다. 유리창이 깨어져 나가도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운동장에는 풀이 우거지고 닫힌 교문에는 녹슨 쇠사슬이 가로로 걸쳐져 있습니다. 학교를 둘러볼 때마다 가슴이 횡한 것은 비단 나이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커다란 뿌리가 쑥 빠져버린 듯한 느낌, 모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4천여 영현중학교 동문은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싱싱한 후배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뛰노는 그런 날이 오리라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을 위해 우리는 해마다 좋은 봄날, 모교 교정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오는 4월 24일 500여 명의 동문들이 잡초 우거진 모교 교정에 모입니다. 단순히 추억을 나누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단순히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학교를 다시 찾을 길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고향을 다시 살릴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할 것입니다. 당장 해법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당장은 재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끝까지 우리 모교와 고향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교가 다시 문을 열고 우리 고향이 활기 넘치는 날, 그 날이 우리 사회와 국가가 건강해지는 날이라고, 이 가혹한 도시 쏠림 현상, 이 참담한 농촌 현실이 극복되는 날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학교는 지역 사회의 중심으로, 지역 젊은이들의 구심점으로 언제까지나 영원했으면 합니다. 없어지는 학교, 문을 닫는 학교가 한두 군데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래도 괜찮은 것인지 정말로 세상을 향해 되묻고 싶습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을 모두가 느꼈으면 합니다. 학교를 함부로 없애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학교가 없어지면 지역이 무너지고 고향이 사라집니다. 그런 사회가 어찌 건강할 수 있겠습니까?
4월 24일, 녹슨 쇠사슬을 거둬내고 우리는 다시 모교에 모입니다. 우리들의 이 안타까운 몸짓에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비록 모교는 인근 학교와 합병이 되었지만 우리 영현중학교 동문들의 학교 사랑 모교 사랑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동문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많은 분들이 우리 모교 영현중학교를 오래 오래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끝으로 교육 당국에 한 가지 바라는 게 있습니다.
최근 모교 건물과 운동장을 임대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합병으로 인한 폐교 당시 교육청 담당공무원과의 40분간에 걸친 마지막 통화에서 몇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첫째, 우리 아이들에게 통학버스를 제공하는 것(이행 여부는 모르겠습니다)과 둘째, 모교 건물이나 운동장을 임대하거나 매각할 계획이 있을 때에는 우선적으로 동문회와 협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문 누구도 최근의 임대 소식을 교육청으로부터 통보받은 바가 없었기에 서형덕 현 총동문회 회장을 필두로 전 동문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비록 구두 약속이긴 하지만 약속은 약속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기 바라며 우리 동문은 끝까지 모교를 버리지 않을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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